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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는 큰 배를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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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가지의 이유로 각별한 수백 개의 도시들이 있지만 이 도시의 이름만큼은 언제나 낮은 탄성과 함께 읊조릴 수밖에 없다. "아... 베네치아." 이 도시에 처음 닿았던 새벽녘, 기차역을 몇 걸음 나서기도 전에 너무나도 예쁘게 바랜 녹색 지붕의 성당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던 대운하의 풍경은 내내 잊을 수가 없다. 그 물길을 따라 흔들리는 배를 타고 찰랑찰랑 물결이 벽을 두드리는 집들을 구경하고 고풍스런 다리 아래도 지나다 보면 어느 새 수십 대의 곤돌라가 옆을 같이한다.
대운하의 끝에는 그 옛날 해상도시를 찾아 온 손님을 맞이하던 관문이자 나폴레옹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부르던 산 마르코 광장이 기다린다. 바다와 바로 닿은 광장에는 계절풍에 막혀 높아진 바닷물도 가장 먼저 밀려든다. 가을에서 봄 사이 도시의 낮은 지대가 물에 잠기는 '아쿠아 알타' 때면, 거리마다 보행용 임시 다리가 세워지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장화는 필수품이 된다. 물에 잠기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 바다에 방벽을 세우는 대공사도 했지만, 사정 모르는 여행자들은 사람 대신 물이 넘실거리는 광경이 신기할 따름이다.
개펄이나 다름없는 진흙 섬들에 통나무를 촘촘히 박아 넣고 나무 기단을 얹은 다음 그 위에 돌을 깔아서 만든 도시, '물의 도시'라는 별명 그대로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땅에 지어 올린 도시다. 그러니 집들 사이사이로 거미줄처럼 물길이 이어지고 그 물길을 넘는 다리만도 수백 개다. 바퀴 달린 교통수단이 없으니 길다란 물길은 수상버스를 타고 다니고, 서로 마주보는 운하 사이는 '트라게토'라는 조각배를 선 채로 타고 건넌다. 이곳의 매력에 푹 빠졌던 괴테가 말했듯, 아무리 물길이 흔들려도 손바닥만 한 배에 꼿꼿하게 서서 중심을 잡을 줄 알아야 베네치아 사람인 게다.
이렇게 흔들리는 물길과 밀어 닥치는 바닷물에 담대한 베네치아 사람들도 견딜 수 없었던 건 한 번에 수천 명씩 쏟아져 들어오는 초대형 크루즈였다. 도시의 기반을 허물어뜨리는 대형 선박의 거센 물살과 아찔한 사고들. 업계에서는 세계 최고의 경치로 베네치아 항을 꼽는다는데, 배에서 훤히 내려다보인다는 말은 땅에서 보기에는 거대한 벽이라도 세워진 듯 꽉 막힌다는 말이다. 오죽하면 테마파크처럼 구경만 하고 떠나는 이들에게 관광세를 물리자는 움직임이 일었겠는가.
며칠 전 18개월 만에 베네치아로 다시 돌아온 크루즈선은 관광업 회복의 기대감으로 내걸린 환영 플래카드와 "큰 배는 싫다(No Grandi Navi)"는 팻말을 든 시위대 사이를 복잡한 마음으로 지나야 했다. 크루즈가 만드는 일자리 수천 개와 크루즈로 망가지는 환경, 승객들이 쓰고 간다는 연간 수천억 원과 그 동선에서 잃어가는 시민 터전의 무게는 무엇이 더 중하다고 매겨질까?
배가 지나는 운하로 튀어나온 곶에는 지금은 미술관으로 쓰는 옛 세관 건물이 있다. 전염병이 돌던 시절 멀리서 배가 오면 40일간 입항을 막으며 방역을 했다는데, 이 40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콰란타(quaranta)가 바로 격리라는 영단어(quarantine)의 어원이다. 그 옛날 역병으로부터 도시를 지켰듯, 더 이상 환경파괴 여행을 하지 않을 저지선을 베네치아는 만들어낼 수 있을까? 잠시 멈춤으로 돌아볼 기회를 주었던 코로나19의 어쩌면 유일한 장점을, 우리 인간이 살려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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