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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빚을 희망의 빛으로 갚고 떠난 선생님

입력
2021.06.14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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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포 예미루(Asfaw Yemiru, 1941?~ 2021.5.8)

에티오피아인 아스포 예미루는 거지 등 불우 청소년 12만여 명에게 글과 세상을 가르친 교육자다. 소년기 한때를 거지로 살았던 그는 자신이 얻은 행운 즉 배움의 기회를 거리의 아이들과 나누기 위해 진학과 출세를 포기하고 저 힘든 길을 택했고, 아이들에게도 가진 것을 더 어려운 이들과 나누라고 가르쳤다. 2017년의 예미루. asrahawariatschool.org

에티오피아인 아스포 예미루는 거지 등 불우 청소년 12만여 명에게 글과 세상을 가르친 교육자다. 소년기 한때를 거지로 살았던 그는 자신이 얻은 행운 즉 배움의 기회를 거리의 아이들과 나누기 위해 진학과 출세를 포기하고 저 힘든 길을 택했고, 아이들에게도 가진 것을 더 어려운 이들과 나누라고 가르쳤다. 2017년의 예미루. asrahawariatschool.org

에티오피아의 9살 거지 소년이 행운을 만나 글을 익힌 뒤 14세 때부터 자기처럼 못 배운 거리의 아이들을 가르쳤고, 20세엔 아예 학교를 지어 교장이 됐다. 그렇게 숨질 때까지 65년간 무려 12만여 명에게 글과 셈법과 자립의 기술을 가르쳤다. 그가 특히 중시한 것은 시민의식과 공동체 윤리. 사회를 이해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 어려운 이들과 가진 것을 나누고 베풀라는 거였다. 그의 제자들과 에티오피아 시민들은 그를 '가셰(Gashe, 암하라어로 '보호자'란 뜻)'라 불렀다. 아스포 예미루(Asfaw Yemiru, 1941?~ 2021.5.8)가 별세했다. 향년 79세(추정).

에티오피아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피식민의 억압과 수탈을 겪지 않은 나라라는 일반적인 설명은 엄밀히 말하면 틀렸다. 고대 로마제국의 망념에 들린 무솔리니가 1935~36년 에티오피아를 침공(에티오피아-이탈리아 2차전쟁)해 만 5년간 통치했기 때문이다. 무솔리니는 36년, 에티오피아와 이웃 식민지 소말릴란드(현 소말리아 북부), 에리트레아를 합쳐 '이탈리아령 동아프리카제국(AOI)'이라 명명하고 통치했다. 그 땅은 2차대전 이탈리아군과 영국군(영연방군)의 동아프리카 전장이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는 41년 수복됐지만, 저 잇단 전쟁으로 많은 이들이 희생됐고, 전후 수도 아디스아바바에는 전쟁과 기아로 인한 고아들이 넘쳐났다.

학교에 입학한 만 9세 거지 소년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9살이던 예미루도 구걸로 연명하던 수도의 거지 중 한 명이었다. 어느 날 한 부유한 터키계(아르메니안) 여성이 수레를 끌고 가다 돌부리에 걸려 수레에 실려 있던 오렌지(일부 자료에는 치즈)를 쏟았다고 한다. 근처에서 그 장면을 본 예미루는, 여성을 도와 오렌지들을 주워 수레에 담았다. 굶주렸을 거지 소년의 그 선행이 대견했던지 여성은 그를 잔일꾼으로 채용했고, 임금 대신 학교에 보내주었다.

새벽에 일어나 하루치 땔감과 물을 길어 놓고, 하교해서도 집안일을 거들며 공부한 그는 8년 초등 과정(4+4)을 4년 만에 이수했고, 빼어난 성적으로 초등졸업자격인증시험(Grade 8 National exam)을 치러 영국인이 운영하던 엘리트 중등 기숙학교인 '제너럴 윙게이트 스쿨(General Wingate Boarding School)'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예미루가 아이들과 함께 지어 61년 개교한 '아스라 하와리아트(Asra Hawariat) 학교(위), 아래 왼쪽은 학교를 짓기 전 교회 마당의 나무그늘 학교의 수업 장면이고, 오른쪽은 72년 무렵의 예미루다. digital.newint.com, asrahawariatschool.org

예미루가 아이들과 함께 지어 61년 개교한 '아스라 하와리아트(Asra Hawariat) 학교(위), 아래 왼쪽은 학교를 짓기 전 교회 마당의 나무그늘 학교의 수업 장면이고, 오른쪽은 72년 무렵의 예미루다. digital.newint.com, asrahawariatschool.org

입학 첫 해, 만 14세의 그는 영국인 교장에게 부탁해 학교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거두어 거리 아이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나면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개중에는 예미루와 함께 노숙하며 구걸하던 친구도, 형-동생처럼 지내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예미루는 부유한 급우들이 버리는 헌옷과 학용품도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글도 배우고 싶어했다. 그의 나무그늘 주말학교가, 학교 옆 교회(St. George's Cathedral) 마당 한편에서 시작됐다. 주말학교는 예미루가 학교 수업을 마치는 평일 오후 4시 30분부터 해가 지기 전인 오후 6시 무렵까지 평일 학교로 이내 확장됐고, 윙게이트의 급우들도 자원봉사 교사로 그를 도왔다.

비가 오면 교회 처마 밑이 교실이 됐고, 교회 묘역 부자들의 묘실에 아예 잠자리를 펴는 아이들도 생겨났다. 예미루와 아이들은 교회 눈총을 받아가며 수업을 이어갔고, 중등 4년(2+2)을 마친 예미루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어 당시 에티오피아에 단 하나 뿐이던 아디스아바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그 무렵 그의 학생은 약 300명에 달했다. 담장과 지붕이 있고, 아이들이 밤을 보낼 수 있는 학교를 짓고 싶었던 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에티오피아 여성 '산과누공' 환자들을 보살핀 호주 출신 의사 캐서린 햄린을 소개하며, 그를 후원한 '계몽 군주' 셀라시에를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봉건 황제지만 스스로 성문헌법(1931)을 제정했고, 노예제를 철폐했고, 전후 중립외교를 고수하며 61년 비동맹국정상회의를 주도해 63년 아프리카통일기구(현 OAU) 초대 의장을 지낸 개혁군주였다. 그가 최빈국 에티오피아의 미래를 위해 힘쓴 정책이 보건과 교육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자원이 없었고, 토호귀족들은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 공백을 메워준 게 영미권 종교-자선단체들이었고, 의료선교봉사를 위해 햄린이 에티오피아에 온 게 1959년, 예미루가 황제에게 편지를 쓰던 해였다. 당시 에티오피아 초등학교 진학률은 고작 3%(61년 3.3%) 수준이었다.

14세에 교사로, 20세에 교장으로

예미루는 아디스아바바 북동부 안코베르(Ankober)의 작은 농촌마을 불가(Bulga)에서 가난한 콥트정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11남매와 함께 양과 염소를 치며 집안 일을 거들던 예미루가 단돈 50센트를 들고 무단 가출, 사흘간 121km를 걸어 수도로 온 것도 그 무렵 역동적인 사회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한 해 전 그는 형제들을 사제로 키우려던 아버지에게 이끌려 수도 나들이를 했고, 고향 마을과 사뭇 다른 도시의 활기에 '바람'이 든 상태였다.

만 14개월 거지 생활 끝에 그가 학교를 다니게 된 건 하늘이 내린 희망의 동앗줄인 셈이었다. 그는 그 동앗줄을 타고 한없이 위로 오르는 대신 자기 같은 아이들을 위한 동앗줄이 되고자 했다. 황제에게 쓴 편지의 요지가 그것, 학교가 필요하다는 거였다.
답장을 기다리다 지친 그는 60년 윙게이트학교를 방문한 셀라시에 황제의 자동차 앞에 몸을 던졌다. 바로 직전 군부쿠데타 미수사건까지 겪었던 황제 경호대는 예미루를 순식간에 제압했지만 황제는 그를 불러 사연을 들었고, 즉석에서 그에게 교회 인근 100평(300㎡) 가량의 빈 땅을 하사했다.

예미루는 아이들과 함께 나무를 베어 목재를 구하고 블록 공장의 깨진 블록을 얻어 학교를 지었다. 아이들과 연극을 공연해 후원금을 모았고, 당시 윙게이트 교장(Mr. Roydes)이 800비르(ETB, 에티오피아 달러)를 보탰다. 그렇게 1961년 '아스라 하와리아트(Asra Hawariat, '사제들의 길'이란 의미) 초등학교'가 개교했고, 그는 280여 명 재학생을 둔 학교 교장이 됐다. 교사 한 명이 3개 학급을 담당하기 위해 교실 벽을 허리 높이까지만 쌓은 학교였지만, 비 맞을 일 없고 매맞을 일 없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밤에는 잠도 잘 수 있는, 아이들의 학교이자 집이었다. 당연히 입학금-등록금도 없고, 교복도 교과서도 없는, 누구든 언제든 오면 되는 학교였다. 윙게이트 교사와 동창생들이, 영미권 선교 자원봉사자들이, 교사로 후원자로 그를 도왔다. 이내 학교는 초만원이 됐고, 입학을 원하는 아이들이 줄을 섰다.
학교가 생겨 나빠진 점도 있었다. 나무그늘 학교와 달리 담장 두른 학교는 아이들을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런 학교여도 칠판은 필요했고, 최소한의 학용품은 지급해야 했고, 전기-수도 요금도 내야 했다. 예미루는 후원금을 모으기 위해 나이가 찬 아이들과 함께 하라리 주 주도인 동부 고원도시 하라르(Harar)까지 왕복 620마일(약 1,000km)을 걷는 모금행진도 했고, 부자들의 연락처를 구해 일일이 전화를 걸기도 했다. 자원봉사자로 왔다가 귀국한 이들도 고국에서 후원금을 모아 보냈다. 북아일랜드 헬렌스베이에서 목사가 된 팀 키나한(Tim Kinahan)도 원년 자원봉사 교사이자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거지 소년들이 노숙 잠자리로 쓰던 널빤지를 가져와 교실 선반을 만들"던 당시의 열정과 어려움을 회고하며 "예미루의 꿈과 강단이 수많은 에티오피아 아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그의 학교는 65년 교육부 정식 인가를 받았고, 학생들은 졸업자격인증시험서 단연 돋보이는 합격률을 기록했다. 예미루는 공무원 월급을 받아 전기-수도요금 정도는 충당할 수 있게 됐지만, 대신 교육 감독당국과 커리큘럼 등을 두고 끊임없이 신경전을 벌여야 했다.

학교는 늘 가난했고, 교회에 빚을 져 이자를 갚아야 할 때도 있었지만, 예미루는 "궁지에 몰릴 때마다 기적처럼 목돈이 들어오곤 했다"고 말했다. 한 복권업체가 미수령 당첨금 6,500 달러를 기부한 적도 있었고, 모교 교장과 영국 윈체스터대학이 2,000달러를 보내오기도 했다. 70년 황실은 그에게 '하일레 셀라시에 프라이즈 트러스트' 상을 수여했다. 상금이 미화 1만 달러였다.
상을 준 이듬해 황제가 예고없이 그의 학교를 방문했다. 외출했다가 그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온 예미루가 허술한 옷차림과 무례를 사죄하자 황제가 '자애로운 태도로(not stern but fatherly)' 그를 맞이하며 "이 나라에 너 같은 아들들이(more sons) 더 많았으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빈손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들은 갚아야 할 빚을 진 셈입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러분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아스포 예미루, 2014년 'Business Hitchhiker' 인터뷰

그 무렵 학교는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교실에서 숙식하는 아이들만 380여 명이었고, 누울 자리가 부족해 하룻밤에 10센트씩 내고 담요도 없는 숙박시설서 잠을 자고 등교하는 학생도 80여 명에 달했다. 시내에 집이 있는 빈민 아이들 중에는 구두닦이 등 노동까지 하며 매일 24km(15마일)을 걸어 등하교하는 아이도 있었다. 황제는 즉석에서 5,000달러를 지원했다. 그렇게 목돈이 생기면 그는 먼저 빚을 갚고, 교실을 늘리고, 기숙사와 양호실을 짓고, 빈 땅에 자기 집을 지었다. 그에겐 아내(Senayet)와 2녀1남의 아이들이 있었다.

근년의 에티오피아는 정치 안정을 기반으로 경제성장과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하며 '아프리카의 호랑이'라 불리는 나라로 급부상하고 있다. 예미루의 교육을 받은 이들도 그 변화에 주역으로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은 근년의 학교 풍경. asrahawariatschool.org

근년의 에티오피아는 정치 안정을 기반으로 경제성장과 사회개혁에 박차를 가하며 '아프리카의 호랑이'라 불리는 나라로 급부상하고 있다. 예미루의 교육을 받은 이들도 그 변화에 주역으로 동참하고 있을 것이다. 사진은 근년의 학교 풍경. asrahawariatschool.org

74년 스탈린주의 군부(Derg) 쿠데타로 황제가 폐위됐고, 내전이 시작됐다. 햄린의 병원이 그랬듯 예미루의 학교도 군정의 야전병원 겸 임시 군영으로 수용됐고, 그도 잠시지만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내전은 91년까지 만 17년간 이어지며 쌍방 100여만 명의 희생자를 냈다. 고아들도 늘어났다. 그나마 다행인 건 사회주의 정권도 문맹퇴치 등 공교육을 중시했다는 점이었다. 그의 학교는 저 힘든 시절을 거치며 2020년 기준 12만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초등 졸업자격인증시험 100% 합격률을 자랑하는 교육부가 인정하는 최우등 학교로 성장했다. 2021년 현재 재학생은 64학급, 5~14세 885명(여학생 474명). 모두 개교 때부터 고수해온 유일한 입학 조건, 즉 고아(입양아) 또는 극빈 가정 아이들이다.

예미루는 교육당국과 마찰을 빚으면서도 일반 공립학교와 커리큘럼을 달리하는 등 교육 실험을 지속했다. 읽기 쓰기 계산하기(3Rs)의 기초교육 외에 모직물-카페트 짜기, 도예와 목공 농업 조경 건설 등 기술교육도 병행했다. 졸업생 모두가 중등학교에 진학할 수 없는 현실, 취업도 여의치 않은 아이들을 위한 자립 교육이었다. 그는 절대적 빈곤과 교육 등 만연한 기회 불평등을 내버려둔 채 큰 예산을 들여 고등교육에 치중하는 당국의 정책을 못마땅해 했다. 아예 초등 기초 4년 과정만 두고 진학을 위한 4년 과정을 폐지한 적도 있었다. 그는 "내 목표는 아이들에게 사회에 나가 자립할 준비를 갖추게 하는 것이지, 진학을 위한 시험에 합격시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내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에게 (공용어인)영어와 암하라어 신문과 라디오를 읽고 듣는 능력, 뜻만 아는 게 아니라 토지개혁이나 경찰의 역할 등을 보며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시민계급으로서 해석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헌법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이 나라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고 에티오피아인의 삶과 문화가 완벽하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식의 양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주된 기준은 아니라고도 했다. "나는 결코 똑똑하지 못한 학생들이 오히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예를 수없이 보아왔다." 그 말은 사회 엘리트가 된 동창생들과 영민한 제자들이 진학과 출세만 추구하며 이웃과 과거를 잊는 예를 허다하게 경험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는 제자들에게 "학교 청소부와 경비원들도 결코 여러분과 다르지 않은 사람"이며 "다만 여러분은 더 젊고 더 나은 기회를 누리게 된 것 뿐"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는 방학 숙제로 제자들에게 글을 못 익힌 부모들을 가르치게 했고, 부모들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러 학생들의 점수를 평가한 적도 있었다.

스웨덴 왕실이 전세계 700여 개 교육관련 기관 및 NGO 등과 함께 2000년 제정한 '어린이 인권을 위한 세계 어린이들의 상(WCP)'은 '어린이(들이 주는) 노벨상'이라 불리는 값진 상이다. 수상자는 각국에서 후보를 추천 받아 최종 후보 3명을 추린 뒤 그들의 공적을 각국 교사 및 교육단체 관계자, 어린이들에게 알려 투표로 결정한다. 매년 많게는 700만 명이 넘게 투표에 참여하는데 절대 다수가 어린이들이다.



첫해 수상자는 '안네의 일기'의 안네 프랑크였고, 2001년 사실상 최초 수상자가 예미루였다. 황제를 만날 때도 입지 않던 양복을 구해 입고 시상대에 선 그는 아이처럼 눈물을 훔치며 그 상(상금 35만 크로나)을 받았다. 시상식 후 '초임 교사에게 특별히 해주는 당부가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학생들에게도 똑같이 하는 말"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빈손으로 태어나 누군가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당신들은 갚아야 할 빚을 진 셈입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여러분의 도움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90년대 내전 종식과 민주화 이후 에티오피아는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모든 면에서 역동적으로 성장하며, '아프리카의 호랑이'라 불리는 나라가 됐다. 유네스코 집계 초등학교 진학률은 89년 29%에서 2015년 86%로 급성장했고, GDP도 2000년대 이후 연평균 10%이상 증가해왔다. 2004년 미화 136달러였던 1인GDP는 2017년 768달러로 5배 이상 늘어났다. 하루 생계비 1.25달러 미만의 극빈층은 2011년 기준 31%로 여전히 많지만, 그 역시 2000년(56%)에 비하면 대폭 줄었다. 여성성기절제(FGM) 근절 등을 위해 활동한 여성인권운동가 보갈레치 게브레를 소개하며 언급한 것처럼 젠더 이슈에서도 약진하며 22개 부처 각료의 절반이 여성이다. 아스포 예미루와 그의 제자들이 저 변화에 기여한 바는 숫자로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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