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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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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나팔꽃보다 짧은 사랑아, 속절없는 사랑아…립스틱 짙게 바르고…내 정녕 당신을 잊어 주리라.”
무슨 노래인지 다 알 거다. 가수 임주리가 1987년 발표했다. 절절한 가사와 파격적 제목(‘립스틱 짙게 바르고’)의 이 노래는 김희갑-양인자 부부가 작곡 작사했다. 1995년 KBS 한국 노랫말 대상을 수상했다. 사랑이 깨진 여자는 이렇게 스스로 위안한다. “그래 사랑은 영원하지 않지, 다른 사랑으로 이 사랑을 잊어줄게.” 립스틱은 그 의지의 표상이다.
이번에는 남자의 이별이다.
“이제는 애원해도 소용없겠지 변해버린 당신이기에…사랑했던 기억들이 갈 길을 막아서지만 추억이 아름답게 남아 있을 때 미련 없이 가야지.”
강승모가 1983년 취입한 ‘무정부르스’다. 여자의 변심을 알고는 아름다운 추억만 남긴 채 미련 없이 보내겠다고 다짐한다. 작년 초 TV조선 ‘미스터트롯’에서 김호중이 열창한 후로 노래방에서 남자들의 목청을 아프게 했다고 한다.
서두가 길었다. 과문한 탓인지 몰라도 ‘안전이별’이란 신조어를 요즘에서야 들었다.
‘안전이별’은 사귀던 사람과 뒤끝 없이 잘 헤어지는 것이다. 스토킹이나 폭력, 협박, 감금, 동영상(리벤지 포르노), 가스라이팅 같은 보복 없이 안전과 자존감을 유지하면서 이별하는 것이다. 헤어진, 또는 헤어지자는 연인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끔찍한 살인 보복까지 저지르는 ‘이별 범죄’가 늘어나면서 등장한 용어다.
이제 여성들은 사랑을 하면서도 ‘안전하게 이별하는 방법’을 대비해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목숨 걸고 이별을 통보해야 한다. 온라인에는 그 노하우를 공유하는 별별 팁들이 많다. 압권은 “나, 사실 빚이 많아서 결혼하기 힘든데 3억 원만 빌려줄 수 있어?”라고 징징대라는 것이다.
세상에 일방적 실연만큼 신열을 앓게 하는 것이 어디 있으랴. 사랑보다 이별을 노래한 대중가요가 더 많다.
그런데 그대, 실연한 자여. 사랑에 유효기간이, 애정에 유통기한이 있음을 몰랐단 말인가. 사랑이 다이아몬드의 탄소원자 결합처럼 단단하다면 유사 이래 문학도 예술도 기댈 곳이 없었을 게다.
“라면 먹고 갈래?” 유혹하던 여자가 어느 날 “우리 이제 헤어져”라고 말할 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물어도 소용없다. 상우는 뒤늦게 깨달았다. 사랑은 영원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는 걸. 봄이 온 순간 봄은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듯이 사랑은 그런 거다.(영화 ‘봄날은 간다’)
그대 실연한 자여. 이별이야말로 최고의 각성이요, 사랑의 상처야말로 삶의 또 다른 동력이라는 걸 나는 소싯적에 깨달았다. 진정 실연이 두렵다면 가장 사랑하는 순간에 떠나보내야 한다. 그게 사랑의 완성이다. 찌질하게 동영상 퍼뜨리고, 염산 뿌리고, 칼 휘두르지 말 일이다.
그래도 부족하면 소주 한잔에 젓가락 두드리며 ‘갈대의 순정’을 불러라. 갈대는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결코 뿌리가 뽑히지 않는다.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이 시를 읽어라.
“이번 정차할 역은/이별, 이별역입니다/내리실 분은/잊으신 미련이 없는지/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내리십시오/계속해서/사랑역으로 가실 분도/이번 역에서/기다림행 열차로 갈아타십시오/추억행 열차는/손님들의 편의를 위해/당분간 운행하지 않습니다.”(원태연, ‘이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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