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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정신은 어디 갔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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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난 금메달을 따긴 했지만,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 내가 만약 최선을 다했더라면 꼴지를 하더라도 더 기뻤을 거야. 니가 더 잘했어, 에디.
영화 ‘독수리 에디’(2016) 속 마티의 대사
제32회 도쿄올림픽 개막(7월 23일)까지 50일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여느 올림픽이라면 지금쯤 열기를 슬슬 지필 텐데, 이번에는 썰렁한 기운만이 맴돌고 있습니다. 개최국 일본에서조차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올림픽 취소 목소리가 높습니다. 평화의 제전을 앞두고 한국과 일본 사이엔 독도를 두고 가시 돋친 설전이 오가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으로 휘청거렸던 열도 경제의 재생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올림픽을 유치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좀 달라진 듯합니다. 대회 취소에 따른 금전적 손실을 최소화하고 싶은 현실적 욕심이 강한 듯합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역시 돈에 눈이 더 가 있는 듯합니다.
도쿄올림픽 홈페이지 지도에 독도를 일본 영토로 표시해놓은 점에서 일본 정부가 올림픽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입니다. 한국 정부가 거세게 항의하는 데도 독도는 “일본 영토”라며 지도에서 뺄 계획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에 불손한 태도를 보이면서 세계인의 잔치를 열겠다는 일본 정부의 이중적인 면모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치가 스포츠를 활용한 건 오래 됐습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 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는 1934년 제2회 월드컵을 이탈리아에 유치해 이를 체제 선전에 악용했습니다. “대중은 큰 거짓말에 더 잘 속는다”고 말한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이탈리아의 사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을 노골적으로 활용해 체제 우수성을 과시하려 했습니다.
올림픽 역사가 정치나 상업주의로만 얼룩진 건 아닙니다. 선의의 경쟁과 우정이 경기장에 넘쳐나던 ‘순수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영화 ‘불의 전차’(1981)는 사사로운 이익보다 개인과 집단의 명예를 중시했던 초기 올림픽 무대를 조명합니다. 대회가 열리기도 전 선수들의 활약에 대한 기대보다는 일본 정부와 IOC의 이익 추구만 부각되는 요즘, 스포츠맨십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1982년 제54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의상상, 음악상을 수상한 수작입니다. 웨이브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불의 전차’는 해롤드 아브라함(벤 크로스)과 에릭 리델(이언 찰슨)을 중심축 삼아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해롤드는 성에서 가늠할 수 있듯 유대인입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지만 그를 향한 시선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해롤드는 유대인을 향한 멸시를 달리기로 극복하고자 합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육상선수로 거듭 나 출신이 아닌 실력과 본심으로 평가 받고 싶어 합니다.
에릭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대학 학생입니다. 아버지가 선교 활동을 하던 중국에서 태어나 선친의 고향에 돌아온 후 럭비 선수로 활동하다 달리기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하느님이 주신 재능을 발휘하는 것도 사명이라고 생각하나 그의 여동생은 중국으로 돌아가 선교 활동을 재개하자고 종용합니다. 에릭은 고민하다 중국 선교를 올림픽 출전 이후로 미룹니다.
출신 배경이 전혀 다른 해롤드와 에릭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금전이나 지위와 같은 세속적인 것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저 자신의 신념을 위해 트랙 위 맨 앞에서 내달리고 싶어할 뿐입니다. 해롤드는 유대인에 대한 편견을 극복할 방편으로 법학 공부로 바쁜 와중에도 기꺼이 시간을 내서 연습에 몰두합니다. 에릭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거라”라는, 연로한 목사의 말에 자극 받습니다. 달리는 것만으로 신앙에 충실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해롤드와 에릭은 올림픽 영국 육상 단거리 대표로서 선의의 경쟁을 펼칩니다. 두 사람이 1924년 제8회 파리올림픽에서 이겨야 할 적수는 미국 선수들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생각지도 않은 난관과 마주하게 됩니다.
재능이 타고난 에릭과 달리 노력파인 해롤드는 코치 무사비니를 고용해 연습합니다. 케임브리지 대학 수뇌부는 마땅치 않아합니다. 순수 아마추어 정신에 어긋난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무조건 이기려는 자세는 저속하네”라며 해롤드에게 면박까지 줍니다. 해롤드는 실력을 기르기 위해 누군가의 지도를 받는 게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다고 반박합니다. 대학 수뇌부의 한 인물은 해롤드가 나간 후 이런 말을 합니다. “유대인은 어쩔 수 없군. 종교가 다르다 보니 추구하는 것이 다를 수 밖에.” 해롤드를 향한 지적에는 편견이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영화는 해롤드가 이런 편견을 뛰어넘어 성취를 이루는 모습을 통해 올림픽 정신을 설파하려고 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건너 뛰고 싶으시면 ☞부터 읽으시면 됩니다.
에릭은 종교적인 신념이 역설적으로 걸림돌이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주종목인 100m 경기 예선이 일요일에 열린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됩니다. 신실한 신자로 “안식일은 온전히 주님의 것”이라 믿기에 일요일 경기에 뛰지 않으려 합니다. 영국올림픽위원회 위원들은 메달 획득이 확실한 에릭을 설득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위원 한 명은 에릭을 “원칙을 아는 진정한 선수를 알아서 기쁘다”고 말합니다. 메달보다 자신의 신념을 더 앞세우는 에릭, 그런 신념을 높이 평가하는 위원을 통해 영화는 스포츠의 가치를 되새깁니다.
해롤드는 에릭이 빠진 1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겁니다. 에릭은 동료 선수 린지의 양보로 400m 경기에 출전하게 됩니다. 린지는 다른 종목에서 이미 메달을 땄다는 이유로 에릭에게 출전권을 넘깁니다. 메달 개수에 연연하기보다 동료가 빼어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온당하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경쟁자인 미국 유명 선수 역시 에릭과 해롤드에게 격려와 축하를 아끼지 않습니다.
☞순수함이 지나쳐 동화 속 이야기 같지만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에릭은 달리면서 이런 말을 마음속으로 합니다. “우리를 끝까지 뛰게 만드는 건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마음이다.” 세속적인 욕심이 아닌, 그저 스포츠에 몰두하고 스포츠를 통해 교류했던 당시 선수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입니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해변가를 달리는 선수들 모습을 비춥니다. 맨발로 바닷물을 찰방거리며 뛰는 선수들 얼굴은 환희로 가득합니다. 경쟁은 둘째치고 함께 달리는 것만으로도 기쁨이 넘쳐납니다. 세계 영화사 속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히는 장면입니다. 케임브리지 대학 수뇌부의 한 인물은 영화 속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스포츠는 인성을 만들고 용기와 정직, 그리고 리더십을 이끌어내거든. 무엇보다 절대적인 충성과 뜨거운 동료애, 그리고 책임감을 길러준다네.” 여러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회를 강행하려 하고 이웃국가와 마찰을 마다하지 않는 일본 정부와 IOC가 새삼 되돌아봐야 할 스포츠맨십과 올림픽의 정신 아닐까요.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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