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입자인데 '세입자'가 아닌 사람들

입력
2021.06.09 04:30
10년 넘게 살아야 받을 수 있는 세입자 이주대책

<1>살 곳 없는 세입자들


편집자주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철거민 가족의 삶을 설명하는 이런 대목이 있지요. 주택 공급, 주거 환경 개선을 표방한 신도시, 뉴타운, 재개발은 가진 사람들에게는 천국입니다. 여전히 폭력적인 개발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사회. 브랜드 아파트에 삶의 터전을 내어주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 혹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 이들의 마지막 흔적을 기록합니다.


지난 2일 '경기도 최대 뉴타운'이 들어서는 광명의 '재개발 2구역'을 드론으로 촬영했다. 이 폐허를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홍인기 기자

“주민이 정착하기보다는 떠나는 개발이죠.” (최은영 도시연구소 소장)

“살던 사람들을 옆으로 밀어내는 사업이죠.”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 이강훈 변호사)

전문가들은 우리나라 재개발 방식을 이렇게 정의했다. 재개발로 그 지역에 있던 작고 저렴한 주택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인근 주택의 전세가격이 급등해 결국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일이 수십 년간 반복돼 왔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떠밀려나는 사람들을 위한 법적 보호 장치는 있다. 2002년 제정된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도정법)에는 세입자 주거대책이 여러 번 언급돼 있다. 지방자치단체가 정비 계획을 세울 때는 반드시 ‘세입자 주거 대책’을 포함해야 하고, 조합이 사업시행계획서를 작성할 때도 ‘세입자 주거 및 이주 대책’을 세우도록 하고 있다.

세입자 이주 대책은 크게 2가지다. 세입자가 새로 지어질 아파트의 임대주택을 신청하거나 가족 수만큼 4개월치 주거 이전비를 받을 수 있도록 돼 있다.


광명에서 50년 넘게 살고 있는 김선이(가명) 할머니가 지난해까지 거주했던 광명1동(재개발 2구역)을 지난 2일 둘러보고 있다. 김 할머니는 '광명 뉴타운' 개발로 두 번이나 살던 곳에서 밀려났고, 다음달 세 번째 이사를 앞두고 있다. 홍인기 기자


10년 넘게 살아야 세입자가 된다

하지만 이 법에서 말하는 ‘세입자’가 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법상 세입자는 지자체가 특정 지역을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하겠다는 계획을 주민에게 알리는 ‘정비구역 지정 공람공고일’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세입자로 살았던 사람을 뜻한다. 그런데 이 공람일로부터 실제 이주와 철거가 시작되는 데까지 보통 10년이 넘게 걸린다. 즉 10년 전부터 같은 구역에서 산 사람만 법적으로 ‘세입자’로 인정받는다는 얘기다.

실제로 내년에 이주가 시작되는 광명 뉴타운 재개발 11구역의 구역 지정 공람일은 2009년 4월 9일이었다. 12년 넘게 한 번도 그 구역을 떠나지 않고, ‘이주하라’는 공고가 날 때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살아야 이주대책을 신청할 수 있다.

이원호 도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부동산 경기가 좋아 재개발이 빠르게 진행될 때는 문제가 적었지만 최근에는 구역 지정 공람일 이후 이주까지 10년 넘게 걸린다”며 “우리나라 세입자들의 같은 집에서 계속 사는 기간이 평균 3.4년으로 매우 짧은 것을 고려하면 대부분의 재개발 지역 세입자들은 법적인 세입자 대책에서 배제된 채 쫓겨난다”고 말했다.

공람일 이전 세입자만 인정하는 것은 보상을 노려 이 지역에 이사오는 걸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구역지정 공람공고는 지자체가 재개발 계획을 주민들에게 제시하는 절차로, 조합 설립이나 주민 동의 투표 등이 실시되지 않은 최초의 단계다. 중간에 얼마든지 구역 지정이 해제될 수도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후 이사 온 사람들을 모두 ‘보상 때문에’ 왔다고 볼 수 없다. 이강훈 변호사는 “정비 구역으로 지정된 곳은 그 지역에서 가장 어려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좁은 세입자 기준 때문에 실제로 그 지역의 세입자 중 이주대책 지원을 받는 세입자는 매우 적다.

법상 세입자로 인정받더라도 재개발 아파트의 임대주택을 신청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원호 책임연구원은 "아파트 지어질 때까지 4,5년을 더 기다려야 하는데, 주변 전세가 올라 주변에선 살지 못하고 더 외곽으로 이주해 그곳에 정착하면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고 말했다.

뉴타운 개발 구역으로 지정돼 주민들의 이주와 철거를 앞두고 있는 광명시 철산 3동 쪽방촌. 동시다발 개발로 인해 광명의 전셋값은 천정부지로 뛰었고, 이곳의 거주자들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홍인기 기자


임시거주시설, 순환형 주택... 법에만 있는 대책들

도정법에 명시된 이주대책은 이외에도 더 있다. 재개발 사업시행자는 세입자에게 임시거주시설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주택 자금 융자를 알선하는 등 상응하는 조치를 할 수 있도록 해 민간개발에서 실제로 임시거주시설을 마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또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이 개발할 때는 필요할 경우 순환정비 방식을 택해 순차적으로 개발하고 세입자에게 순환용 주택을 공급하도록 하고 있지만 민간 개발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재개발 사업 대부분은 민간이 진행한다.

결국 세입자 대책을 받을 수 있는 세입자도 한정적인 데다 실제 대책들도 실효성이 크게 없다.

최은영 소장은 “지자체는 조합이 새 아파트의 임대주택 비율만 지키고, 세입자에게 주거 이전비만 주면 이주대책을 수립한 것으로 본다”며 “법도 구멍이 많고 지자체들도 민간 개발에 별도로 신경 쓰는 곳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나마 재개발 문제로 수십 년간 수많은 갈등을 겪어온 서울시는 조금씩 제도를 보완하고 있다. 서울시는 임대주택 신청 조건을 정비구역 지정 공람공고 3개월 전부터 거주한 세입자로 하되,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해 기초생활수급자는 ‘사업시행인가 신청일’로 바꾸도록 2012년 조례를 개정했다. 현행 법상 기준인 ‘구역 지정 공람공고일’이 재개발의 제일 첫 단계라면, 사업시행인가 신청일은 사업이 확정돼 절반 이상의 절차가 진행된 시점이다. 그러나 서울 외 지역은 이런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21세기 난·쏘·공 : 글 싣는 순서

<1>살 곳 없는 세입자들

<2>생계 잃은 농민들

<3>내몰리는 상인들

<4>한국식 폭력적 개발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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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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