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에 속아 헐값에 입주권 파는 노인들

입력
2021.06.09 04:30
유엔, "노인에게 오랜 집은 각별, 지속 거주 지원해야"
한국 지자체는 모조리 조합에 맡기고 뒷짐

<1>살 곳 없는 세입자·영세가옥주


편집자주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단 하루라도 천국을 생각해보지 않은 날이 없다.'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는 철거민 가족의 삶을 설명하는 이런 대목이 있지요. 주택 공급, 주거 환경 개선을 표방한 신도시, 뉴타운, 재개발은 가진 사람들에게는 천국입니다. 여전히 폭력적인 개발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 사회. 브랜드 아파트에 삶의 터전을 내어주고 떠나야 하는 사람들, 혹은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사람들. 이들의 마지막 흔적을 기록합니다.


광명 뉴타운 재개발을 위해 주민들이 이주를 앞두고 있는 지역의 부동산 중소업소들. 허름한 주변 상가들과 달리 형형색색 화사한 색깔로 눈길을 사로잡으며 '재개발 매물'을 접수하고 '입주권'을 매매한다. '뉴타운' '푸르지오' '자이' 같은 이름에서부터 중산층의 욕망을 고스란히 대변한다. 남보라 기자

“부동산에서 할머니들한테 만날 딱지(입주권) 팔라고, 팔라고 했지. 얼마나 난리였는지 몰라. 2억도 못 받고 딱지 판 할머니들도 있었다니까. 할머니들이 아무것도 모르니까 쌀 때 다 팔아버린 거지. 나는 그나마 자식들이 알려줘서 끝까지 버티다 팔아서 (총 입주권 가격으로) 프리미엄(웃돈) 4억에 땅값 1억7,000만 원 받았어.”

지난달 중순, 한창 철거가 진행 중인 광명 뉴타운 재개발 2구역(광명 1동) 인근에서 만난 60대 후반 A씨. 그는 개발에 대해 잘 모르는 독거 노인들이 부동산 중개업소 등쌀에 제값도 못 받고 뉴타운 입주권을 팔아버렸다고 성토했다.

몇 년 기다리면 새 브랜드 아파트에 입주하거나, 더 비싼 값에 아파트를 팔 수도 있는데 왜 입주권을 팔았냐고 물었다. “노인들이 돈이 어디 있어서 아파트를 들어가. 그때까지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까 다 딱지 팔고 나갔지” 4, 5년 뒤에나 완공되는 아파트에 입주하는 건 집을 가진 노인들에게도 애초에 불가능한 선택지라고 했다.


지난해 주민들이 모두 이주한 광명 뉴타운 재개발 2구역(광명 1동)의 주택 대문에 '공가 안내문'이 붙어있다. 이 곳에서 수십년 간 살았던 노인들 대부분이 헐값에 입주권을 팔고 다른 지역으로 이사갔다고 한다. 남보라 기자

결국 세입자든 집주인이든 재개발은 노인들에게 남 좋은 일일 뿐이다. 세입자들은 더 열악한 주거로 내쫓기고, 정보에 어두운 집주인들은 입주권마저 헐값에 팔고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참여연대 민생희망본부 실행위원인 이강훈 변호사는 “재개발 구역 내 어르신들은 집주인이라고 해도 수천만 원~수억 원의 추가 분담금을 낼 여력이 안 돼서 다 팔고 나간다”며 “결국 다른 지역에 가서는 세입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따로 경제활동도 하지 못하고 가진 거라곤 낡고 작은 집 한 채가 전부인 ‘영세 가옥주’가 많기 때문이다. 재개발 지역에서 주거권을 가장 크게 침해당하는 사람들이 바로 세입자와 영세 가옥주다.

노인들에게 오래 산 집과 동네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 지역에서 오래 살아 공동체가 있다는 것은, 가족보다 가까운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는 의미다. 당장 급할 때 도움을 주는 사람,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소소한 속사정들을 해결해주는 사람도 이런 이웃들이다. 또 거주지가 바뀌면 주기적으로 방문해 독거 노인의 안전을 확인하고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생활지원사, 건강이 좋지 않은 노인들에게 돌봄과 가사 서비스를 제공하는 요양보호사도 바뀐다. 철거는 이 모든 사회적 관계망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동반할 수밖에 없다.

이에 유엔 사회권 규약위원회는 노인의 사회적 권리에서 주거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1995년 채택된 일반 논평 6호 '노인의 경제적, 사회적 및 문화적 권리' 중 11조 '적절한 생활 수준을 누릴 권리'에 나오는 내용의 일부다.

“‘고령화에 관한 비엔나 국제행동계획’의 권고 19~24는 노인의 주거는 단순한 주거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주거의 물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심리적, 사회적인 중요성도 고려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따라서 국가 정책은 주택의 복구, 개발, 개선 그리고 노인들이 주택에 접근하고 사용하는 능력을 고려한 개조를 통해서 가능한 한 오래 자신의 주거지에서 지속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권고 19). 권고 20은 고령화 문제에 특별한 관심을 두고 노인들의 사회 통합을 지원하는 도시 재건축 및 개발 계획과 법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세계고령화총회가 1982년 채택한 ‘고령화에 관한 비엔나 국제행동계획’은 노인에 관한 최초의 국제문서로 유엔 총회에서도 승인했다. 각종 국제기구와 각 국가의 고령화 대응책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재개발 과정에서 노인들에 대한 별도 대책을 세우는 경우는 없다. 지방자치단체는 재개발 사업 계획과 승인에만 관여할 뿐, 세입자 등 원주민의 이주대책을 조합에 모두 맡겨버린다. 조합은 법상 보호 조건에 맞는 세입자에게만 주거 이전비 등을 지원할 뿐 고령자에 대한 대책을 따로 마련하지는 않는다. 광명시 관계자는 “이주자들의 연령을 구분해서 별도로 대책을 마련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강훈 변호사는 "젊은 사람들이 이사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며 “노인에게 주거를 옮긴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인데도 우리나라는 고령 주거층에 대한 배려 없이 재개발을 진행한다”고 비판했다.

지난 2일 드론으로 촬영한 광명 뉴타운 재개발 2구역 . 이미 철거된 곳과 철거를 앞둔 주택가가 넓게 펼쳐져 있다. 홍인기 기자

◆21세기 난·쏘·공 : 글 싣는 순서

<1>살 곳 없는 세입자·영세가옥주

<2>생계 잃은 농민들

<3>내몰리는 상인들

<4>한국식 폭력적 개발 언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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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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