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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년 전 이춘재까지 찾아낸 최면수사, 거짓말 땐 몸이 반응한다[Deep & w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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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식을 마치고 대리운전기사를 불렀던 30대 여성은 차 안에서 술에 취해 잠들자 기사가 가슴을 만지고 성폭행하려 했다고 신고했다. 그리고 잠에서 깨 소리를 지르자 기사가 블랙박스를 훔쳐 달아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절도와 추행 혐의를 받은 40대 남성 대리운전기사는 오히려 여성이 자신의 몸을 만지며 추행했다고 억울함을 호소했다. 피해자는 피의자의 주장을 부인하면서 '술에 취해 당시 상황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증거가 담긴 블랙박스는 사라졌고 두 사람의 상반되는 진술만 있는 상황에서 사건의 진실을 어떻게 풀어 낼 수 있을까?
법최면 수사는 이처럼 사건 당사자가 사건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 실시하는 수사 방법 중 하나다. 고 손정민씨 실종사건을 수사하던 경찰이 함께 술을 마셨던 친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법최면 수사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최근 주목을 받고 있다.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이른바 '필름 끊김 현상'(블랙아웃)일 수도 있고, 충격과 공포 등 사건 당시 입은 심리적 외상 때문일 수도 있다. 시간이 오래 지나서일 경우도 있다.
법최면 수사의 대상은 피해자나 목격자처럼 범죄 혐의점이 없는 사건 관련자로 한정된다. 강제 수사 아닌 임의 수사의 하나인 만큼, 본인이 자발적으로 동의한 경우에만 진행된다. 용의자는 대상이 되지 않는 건 최면 상태에서 의도적으로 진술을 왜곡할 가능성이 있어서다. 다만 범행을 자백한 이후에 시신의 유기 장소 발견을 목적으로 실시하기도 한다.
최면 수사는 거짓말 탐지(폴리그래프)와는 많이 다르다. 무엇보다 거짓말 탐지 검사는 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사건 관련자가 대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대리기사 대 승객' 케이스처럼 중요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건은 거짓말 탐지 검사기법을 쓸 수 없다. 거짓말 탐지 검사는 ‘무엇을 했다, 아니다’와 같은 객관적 사실관계에 대한 진위 여부를 신체적 반응을 통해 측정, 판별하는 검사다. ‘어떤 기억이 나느냐’ 같은 추상적 질문은 거짓말 탐지로 밝혀낼 수 없다.
법최면 수사를 의뢰받은 수사관은 대상자와 사전 면담 과정을 갖는다. 그리고 맞춤형 대화를 통해 최면에 대한 오해와 불신을 해소시키고 '라포'(rapport·신뢰관계)를 형성한다. 만약 대상자가 불안과 불신을 가진 상태라면 최면에 몰입하기 어려우므로 이 신뢰 구축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최면 몰입도 측정을 위해 눈동자 보기, 눈꺼풀 붙이기 등 감수성 검사도 동반된다.
법최면 수사가 시작되면, 점진적 이완 기법과 최면 유도 기법을 사용해 우선 대상자의 신체를 이완시킨 다음 최면 상태에 몰입하게 한다. 대상자의 최면 몰입 여부는 신체 이완의 정도와 호흡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몰입한 법최면 대상자는 수사관의 암시에 따라 반응하게 된다. 수사관은 사건 당시 상황을 떠올리게 한 후 “지금 당신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어떤 상황인가요” 등 개방형 질문을 던져 대상자 스스로 당시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도록 한다. 이때 대상자는 당시 상황을 재경험하게 되는데 괴로움에 울거나 통증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때 수사관이 “그날의 기억은 생생해도 지금의 감정은 느낄 수 없다”는 암시를 하면 이내 평온을 찾는다. 이를 '최면 암시 효과'라고 한다.
법최면에 들어간다고 해서 무의식상태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의식이 명료한 몰입과 집중의 상태이다. 자신의 진술 내용이 합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고, 최면에서 깨어난 후에도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의 기억이 떠오르거나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 되면 말을 하지 않거나 각성 상태로 되돌아온다. “당신의 뺨을 때리십시오”처럼 회피하고 싶은 암시를 듣는 경우에도 몰입이 깨지면서 각성상태로 돌아온다.
법최면의 성공 여부는 피검사자의 성향에 크게 좌우된다. 대개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은 기억해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최면 몰입이 힘든 편이다. 반면 감성적이고 협조적인 사람은 몰입이 상대적으로 쉬운 경향이 있다. 최면 과정에서 심리적 상처(트라우마)나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마음의 벽(심리적 방어기제)이 나타나는 경우에도 몰입하기 어렵다. 의식적 방어기제(억제)뿐 아니라 무의식적 방어기제(억압) 모두 해당한다.
법최면 상태가 되면 항상 솔직하게 진술할까? 거짓말 가능성은 없을까? 수사관은 대상자의 신체적 변화를 통해 이를 감지할 수 있다. 대상자가 의식적으로 기억과 다른 진술을 하는 경우 안구 움직임과 말의 속도 등이 몰입한 상태와 달라지기 때문이다.
물론 최면에 몰입해도 당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무언가에 주목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경우라면 당시 기억을 꺼내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쉽지 않다. 화성연쇄살인 사건에서 버스 안내양이 31년이 지난 뒤에도 법최면을 통해 “당시 용의자의 생김새가 이춘재와 똑같았다”는 기억을 인출할 수 있었던 건 당시 버스에 탄 이춘재의 옷이 비가 오지 않는데도 젖어 있었다는 일상적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법최면 수사는 평균 2~3시간 정도 소요되지만 피해자가 심한 트라우마 증상을 호소할 경우 6시간을 넘기기도 한다. 그런데도 대부분 20~30분 정도 지난 것 같다고 느끼는데 이는 몰입으로 인해 시간의 왜곡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최면이 끝나면 대상자는 사후 면담 과정에서 추가적으로 보다 세밀하고 새로운 사실들을 기억하게 된다. 법최면 수사관은 이 모든 정보를 취합해서 수사에 단서와 방향성을 제시하게 된다.
법최면이 활용되는 사건은 주로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가 만취상태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한 경우다. 그런데 법최면 수사를 실시한 결과 뜻밖의 반전이 일어나기도 한다. 위 '대리기사 대 승객'사건에서 피해자(승객)는 법최면을 통해 자신이 먼저 피의자(대리기사)의 몸을 만졌으며 블랙박스는 처음부터 부착돼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회상하게 되었다. 피의자 역시 거짓말 탐지 검사 면담에서 일부 범행을 인정하는 진술을 하면서 법최면 수사 이후 수사의 방향이 전환됐다.
법최면은 수사목적 이외에, 피해자의 심리적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해외입양인의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헤어진 가족을 찾는 데 성공한 사례도 있다.
법최면 수사는 아직 법적 증거능력을 갖지는 못한다. 형사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려면 실체적 사실관계가 증명되어야 하는데 최면 상태의 기억은 재구성 가능성이 있어 그 진술의 진위 및 정확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것이 법원의 입장이다. 법최면을 통해 인출된 내용이 객관적 사실과 부합하고 이를 뒷받침할 자료가 보강될 경우 법정 증거로 쓰이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그럼에도 법최면은 수사 과정에서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시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8년 부산의 유괴 사건에서 처음 적용된 이래 2008년 강호순 사건, 2009년 장자연 사건 등에 기여했으며 최근에는 이춘재 사건, 반포한강공원 대학생 사망 사건으로 조명받고 있다.
경찰은 법최면 수사의 정교화를 위한 전문교육을 진행 중이며, 현재 전문수사관 27명이 전국의 시도 경찰청에 배치되어 있다. 앞으로 법최면 수사가 거짓말 탐지, 진술 분석, 심리 분석등과 접목해 보다 통합된 수사분석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여일한 전라북도경찰청 법최면 전문수사관
1992년 경찰에 입직해 2008년부터는 줄곧 과학수사 분야에서 근무했다. 법최면 전문수사관, 폴리그래프검사 전문수사관, 위기협상 전문요원으로 활동하면서 관련 수사관 양성 교육에도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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