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갈 수 없는 곳

입력
2021.06.03 19:00

결혼이민자들을 위한 한국어교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녀는 베트남에서 온 란이다. 그녀는 중국에서 온 왕리이기도 하고, 필리핀에서 온 자넷이기도 하다. 그녀의 이름이 지영이면 또 어떤가? 사실 그녀에게 이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녀가 사는 세계에서 그녀에게 부여된 특성이란 외국 출신이라는 점과 ‘결혼한 여자’라는 것뿐이고, 그 이외에 그녀에게 부여된 고유한 개성은 전혀 없으므로.

그녀는 한국어 조사 ‘-에’를 배운다. 그녀에게 ‘-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명사와 결합하여 사물이나 건물, 장소의 위치를 표현하는 조사.’ 이 설명은 언어의 불순물을 거르고 걸러 만들어낸 순수하고 단단한 결정 같다. 거기에는 균열도 없고 티끌 같은 흠도 없다. 누가 감히 여기에 어떤 편견이나 차별이 개입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녀는 이런 ‘-에’를 이용해 세탁기가, 냉장고가, 텔레비전이, 침대가, 전기밥솥이 어디에 있는지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묻는다. 여보, 양말은 어디에 있어요? 서랍 안에 있어요. 어느 서랍에 있어요? 침대 옆 서랍에 있어요. 안경은 어디에 있어요? 그것은 책상 위에 있어요.

그녀는 오래전 최초로 결혼이주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한국어 교재 속에서 산다. 사람들은 한국어 교재가 한국인들이 잘 쓰지 않는 유치한 문장이 잔뜩 쓰여 있는 책일 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언어 교재는 일종의 가상 세계이다. 그 가상 세계에서는 가상의 인물들이 서사를 만들어내며 살아간다. 거기에는 은폐된, 그러나 단단한 세계관이 있다.

우리의 주인공이 사는 세계는 대화문과 문법 및 문형 연습, 여러 예시문 속에 건설되어 있다. 앞서 소개한 대화문은 그녀가 어떤 세계에 사는지 보여준다. 그녀는 남편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다. 이 대화에서 그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매일 신는 양말도 못 찾는 남편에게는 질문할 권리가 있지만, 그녀에게는 질문할 권리가 없다.

조사 ‘-에’가 제시된 이 교재의 세계를 다시 둘러보자. 이 세계에서 장소란 ‘집 안’의 방들만을 가리킨다. 사물들은 가전이나 가구뿐이다. 이를테면 한국어 조사 ‘-에’가 사용되는 이 세계에서는 결혼이주여성의 신체가 집 안에만 머물도록 설계되어 있다. 새롭게 배운 언어로 이 여성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집 안 물건의 위치뿐이다.


결혼이민자들을 위한 한국어교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렇다면 결혼이주여성을 위한 교재가 아닌 다른 일반 한국어 교재 속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일반 한국어 교재의 ‘-에’가 등장하는 단원에는 우체국, 약국, 극장, 백화점, 공항, 남산, 인사동, 대학로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런 장소들은 그녀가 갈 수 없는 곳이다. 그녀가 사는 세계에서 결혼한 여성은 집 밖으로 나설 수 있는 존재, 길 위에서 자신이 가고 싶은 곳을 찾을 수 있는 존재, 자신의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물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제 연결어미 ‘-아/어서’를 말할 수 있다. 당신이 금요일 저녁에 집에 ‘가서’ 맥주를 마시고, 토요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브런치를 느긋하게 즐겼다라고 말할 때 쓰는 바로 그 연결어미 말이다. 당신은 그녀에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결어미는 선행하는 절의 내용이 후행하는 절의 내용으로 이어지는 것을 의미해요. 사람들의 일상이나 일과를 이야기할 때 쓸 수 있어요. 자 이 문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해 보세요.

이런 설명에 도대체 무슨 차별이 있나? 그녀는 이 연결어미를 이용해 자신의 일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녀의 일상은 이렇다. ‘마당에 나가서 빨래를 하고’, ‘계란을 삶아서 먹고’, ‘친구를 만나서 시장에 가며’, ‘과일을 씻어서 접시에 담는다.’ 또는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아침을 준비한다.’ 그녀의 세계에서 그녀가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이란 집과 시장뿐이다. 그녀가 행하는 대부분의 행위는 가족을 위해 이루어지는 노동이다. 그녀는 한 대화문에서 ‘차례 준비는 누가 해요?’라는 선생님의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형님하고 제가 같이 할 거예요. 설날 아침에는 일어나서 떡국만 끓이면 돼요.’ 도대체 그녀는 누구를 위한 일상을 사는가?


명절음식 만들기 행사에 참가한 결혼이주여성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 글은 오래전 출간된 교재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적 공정성을 담보하지 못한 한국어 교재들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그간 학계 내에서 많은 비판과 반성이 있었고, 실제로 이를 개선하는 작업 또한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이 교재의 세계관을 언급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문법과 문법 교육이 중립적이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문법은 우리의 행위를 규율할 때 사용되는 틀이다. 외국어 교육에서 문법 교육은 문법을 통해 학습자에게 어떤 사회적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일, 나아가 어떤 행위자가 되라고 요구하는 일이다.

우리는 문법을 순수한 결정체로 표상하지만, 사실 문법은 우리의 질척이는 현실과 삐걱거리는 육체 속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는 문법에서 그 육체성을 떼어낼 수 없다. 역으로 문법 교육의 내용은 문법과 더불어 우리에게 어떤 사회적 행위가 체화되어 있는지, 또는 특정 대상에게 어떤 사회적 행위를 할 것을 요구하는지 은연중에 노출시킨다.

외국어 교재는 특정 언어를 학습하는 학습자들에게 그 목표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상식’을 구축하고, 그 상식을 학습자들의 몸에 주입시킨다. 그런데 손님으로서 한국어를 배우는 학습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재의 상식과 결혼이주여성처럼 ‘우리 식구’가 된 학습자들에게 들이대는 상식은 다르다. 손님 학습자들에게 적용되는 상식이 그들 눈에 우리 사회가 이렇게 비쳤으면 하는 욕망으로 나름의 체면을 차린 것이라면, ‘식구’를 위한 상식에는 이런 체면을 차리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교재가 제일 처음으로 결혼이주여성을 위해 만들어진 것임을 상기해 보자. 그래서인지 이 교재에서는 한국 사회가 결혼한 여성에 대해 가지고 있던 체면 차리지 않는 상식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어떻게 보면 교재 속 결혼이주여성들은 이 사회의 무의식이 눈치 보지 않고 가부장제의 욕망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는 최적화된 대상이다. 이들은 어떠한 사회적 문화적 자본도 가지고 있지 않은 존재들, 심지어 언어 자본도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교재는 남편의 어이없는 요구를 비난하지 않고, 명절 준비에도 갈등하지 않는 가부장제 맞춤형 여성의 ‘순수한’ 표상을 보여준다. 본래 이 표상은 결혼한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이 마땅히 본받았어야 할 것이었다. 란이든, 왕리이든, 자넷이든 여성의 이름이 무슨 상관인가? 사실 그 이름 대신 지영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면 더 좋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교재는 결혼이주여성이라는 소수자에 대한 시각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이 교재의 세계관은 한 ‘결혼한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진짜 상식’과 무의식이 무엇인지 노출한다. 지금은 통하지 않는 오래전의 상식일 뿐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보이지 않는 상식은 지금도 현실에 단단히 버티고 있다.

차별하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악당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러나 차별은 악당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차별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문법 교육에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교재제작자 중 누가 자신이 차별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겠는가? 그러나 교재에는 그녀가 갈 수 없는 곳, 할 수 없는 말이 가득하다.

이처럼 우리는 차별하지 않으면서도 차별한다. 차별은 체계이기 때문이다. 이 체계로서 차별을 작동시키는 핵심적인 역학은 차별하는 사람들이 자신이 차별하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것에 있다. 부끄럽지만 사회에서 유통되는 언어의 성질을 살펴보면 볼수록 나는 내가 차별의 체계를 구성하는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차별한다. 내가 여기에 올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갈 수 없는 곳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질 수 있던 많은 것들은 그녀가 가질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 때문이다.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공고한 세계는 그녀에게 금지된 온갖 것들 위에 세워져 있다.

남성 혐오의 비밀 상징인 집게 손 찾기가 요즘 유행이라고 한다. 그러나 진짜 찾아야 할 숨은 그림은 집게 손이 아니다. 우리가 정말 찾아야 할 숨은 그림은 차별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자기 양말 한 짝도 찾지 못하는 교재 속 남자를 본다. 이제 보인다. 저 남자의 모습 속에는 내 얼굴이 숨겨져 있다.

백승주 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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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주전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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