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관 성추행 사망'을 '단순 변사'로 보고...이런 군에 수사 맡겨도 되나

입력
2021.06.02 20:1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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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추행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A중사의 영정이 2일 경기 성남 소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놓여 있다. 뉴스1

강제추행 피해 사실을 신고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공군 A중사의 영정이 2일 경기 성남 소재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에 놓여 있다. 뉴스1

공군이 ‘성추행 피해 부사관 사망 사건’을 국방부에 ‘단순 변사 사건’으로 최초 보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2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충남 서산의 모 공군 부대는 피해자인 A중사가 숨진 채 발견된 이튿날인 지난달 23일 국방부 조사본부에 ‘영내에 발생한 자살 사건 조사 중’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보냈다. 그러나 사망자가 두 달 전 성추행 피해를 당한 A중사였다는 사실은 누락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공군 수뇌부로부터 해당 사건을 처음 정식 보고 받은 시점은 지난달 25일로, 당시에는 사망자가 A중사라는 사실이 보고에 포함됐다. 해당 공군 부대 실무자가 23일 보고 당시 성추행 사건을 숨기기 위해 의도적으로 축소 보고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공군의 은폐 정황이 있음에도, 서 장관은 공군에 성추행 사건 수사를 다시 맡겼다. 언론 보도로 사건이 알려진 직후인 지난 1일 서 장관은 공군 법무실장을 수장으로 하는 특별수사단 구성을 지시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모른다는 비판이 쏟아지자, 10시간 만에 수사 주체를 국방부 검찰단으로 바꿨다.

국방부 검찰단은 2일 피의자인 B중사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피해자인 A중사가 사망한 뒤 이뤄진 뒷북 조치다. B중사는 성추행 사건이 발생한 올해 3월부터 두 달 넘게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를 받아왔다.

국방부가 뒤늦게 수사 의지를 보이는 것이지만, 사건 발생과 사후 대응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점에서 국방부가 수사를 주도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군 합동수사단을 꾸려 전문성 있는 민간 인력을 수사에 투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무성하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2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접견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욱 국방부 장관이 2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접견실에서 성추행 피해 신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한 공군 여성 부사관의 유가족을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뒤늦게 유가족 만난 서욱… 피해자 모친 실신도

서 장관은 2일 A중사 시신이 안치된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서 유가족을 만났다. “2차 가해와 지휘관들의 조치를 낱낱이 밝혀 죽음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하겠다”며 “한 점 의혹이 없게 수사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저도 딸 둘을 둔 아버지로 딸을 돌본다는 그런 마음으로 낱낱이 수사하겠다”고 강조했다.

비공개 면담이 끝난 뒤 A중사의 모친은 “우리 애가 너무 보고 싶다”며 오열하다가 쓰러져 구급차로 이송됐다.

서 장관은 지난달 25일 뒤늦게 이성용 공군참모총장으로부터 유선으로 해당 사건을 보고 받았다. 해당 사건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기 6일 전, A중사의 시신이 발견되고 사흘이 지난 시점이다. 육·해·공군에서 자체 사법부가 운용돼 영관급 이하의 성범죄는 국방부 보고 의무가 없어 즉각 인지하지 못했다는 게 군 당국 설명이다.

서 장관은 당시 공군에 △2차 가해 여부를 비롯한 한 점 의혹 없는 수사 △유가족 보호 및 지원 △고인에 대한 예우 마련 등을 지시했다. 그러나 국방부의 대처는 안이했다. 한 차례 은폐 정황이 있었지만, 국방부는 사안을 보고받은 뒤에도 수사 상황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다.

조직적 회유와 은폐 의혹을 받는 B중사의 휴대폰을 해당 부대 검찰이 확보한 건 A중사가 사망한 이후인 지난달 31일이었다.

서욱 국방부 장관이 2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안치된 A중사의 주검 앞에서 영정을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서욱 국방부 장관이 2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 장례식장 영안실에 안치된 A중사의 주검 앞에서 영정을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성범죄 피해자 쉼터를 ‘도란도란’으로 칭한 국방부

군인으로 구성된 군 검찰단과 국방부의 성인지 감수성으로 이번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국방부 역시 넓은 의미의 내부자로, 내부자의 시선에서 사건을 바라볼 우려가 있다. 국방부 조사본부는 지난해 7월 군내 성폭력 피해자가 휴식을 취하고 상담을 받을 수 있는 쉼터를 개소하면서 그 이름을 ‘도란도란 쉼터’라고 붙였다. 내부 공모와 투표를 거쳐 정해진 명칭으로, 보도자료에 “소통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에 적합하면서 정겹고 따뜻한 어감으로 부르기 좋아 명칭으로 선정했다”고 적시했다. 성폭력 피해를 ‘정답게 이야기할 주제’로 치부한 외부와 동떨어진 군 내부의 성 인식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였다. 해당 쉼터는 현재도 ‘도란도란 쉼터’다.

이 같은 우려를 인식한 듯, 서 장관은 2일 유족을 만난 자리에서 “군 검찰을 중심으로 수사하는데 민간 전문가도 참여시키고 도움을 받아가면서 투명하게 수사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현행법상 현역 군인은 군 내부에서 수사를 해야 한다는 제도적 한계가 있다"며 "민간 전문가는 수사에 참여하기보다 자문위원회나 심의위원회에서 활동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자문, 심의로 수사 상황을 점검하고 감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에 민·군 합동조사단을 꾸려 의혹을 말끔히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가 2일 “문재인 대통령도 A중사의 극단적 선택에 가슴 아파하며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보고 있다”고 전한 만큼, 청와대 차원의 대책 마련이 주목된다. 정부 관계자는 “2018년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계엄령 문건 논란 당시 민ㆍ군 합동수사본부를 꾸렸던 것처럼 국방부가 마음만 먹으면 민간 전문가를 수사에 투입시키는 건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국방부는 3일부터 2주간 ‘성폭력피해 특별신고기간’을 운영한다고 밝혔다. 매년 2회 정례적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이번 사건을 계기로 다른 군내 피해 사례를 선제적으로 파악해 조사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이 역시 뒷북 조치다.

국방부 공동취재단




정승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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