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父子 독재' 시리아 아사드 정권 50년, 쿠르드 '민주연방제' 꿈 멀어지나

입력
2021.06.05 05:30
19면

시리아 서북부 알레포의 대선 투표소에서 지난달 26일 한 여성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 알레포=AFP 연합뉴스

시리아 서북부 알레포의 대선 투표소에서 지난달 26일 한 여성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 알레포=AFP 연합뉴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시리아 북동부 쿠르드 주류 지역 로자바의 통치 기구인 ‘북동부자치행정부(AANES)’는 인근 아사드 정부 통제 지역 왕래를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 이틀 후인 26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역내 주민들이 정부군 영토로 넘어가 투표하는 걸 막기 위한 조치였다. 북동부 무장 조직 ‘시리아민주군(SDF)’도 정치국 ‘시리아민주협회(SDA)’의 이름으로 이번 대선을 보이콧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성명은 “시리아인들의 삶과 권리, 그리고 우리의 정치적 대표성이 담보되지 않는 한 SDF는 어떤 선거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 못박았다. 또 이번 대선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2254호 정신에도 어긋난다”고 지적했다.

안보리 결의안 2254호는 “유엔 감독 하에 치뤄질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와 디아스포라(재외동포)를 포함한 ‘모든 시리아인’의 선거 참여를 강조했다. 이번 시리아 대선의 경우 유엔 관리 감독도 없었고, 일부 재외동포에게는 투표를 허용하지 않았다. 500만명이 넘는 시리아 전쟁 난민들 역시 배제됐다. 이번 선거가 결의안 2254호 정신에 반한다는 해석이 그리 틀린 말은 아닌 셈이다.

시리아 정부 공식 발표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는 1,423만9,000명이 참여해 투표율 78.6%를 기록했고, 95.1%를 득표한 바샤르 알 아사드 현 대통령이 4선에 성공했다. 4선 아사드가 직면한 건 아버지 하페즈 알 아사드부터 이어지고 있는 ‘가문 독재’ 정당화용 요식 행사라는 비판뿐 아니다. 선거 부정도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달 28일 시리아 북부 기반 매체인 ‘북부 프레스 에이전시(NPA)’는 알레포 지역의 한 투표소에서 벌어진 부정 선거 상황을 영상으로 폭로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에는 투표소 직원이 아예 투표용지 위에 적힌 이름 셋 중 아사드 후보의 이름 아래 잇따라 기표하는 행위가 담겼다. 비밀 선거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가능성이 있다.

어쨌든 흥미로운 건 아사드 정권도 AANES 자치 지역 내 투표소 설치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투표소 설치가 SDF의 주요 요구 사항인 ‘시리아 연방 내 동북부 자치’를 인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도 있다는 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 자치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는 아사드 정부로서는 아예 투표권을 박탈하는 편이 더 선명하게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것일 수 있다. 대신 시리아 정부는 북동부 주민들이 정부군 통치 지역으로 넘어와 투표권을 행사하기를 바랐던 게 분명하다. SDF가 선거 이틀 전 두 지역 간 왕래를 제한한 배경이다. 이동 제한은 선거 이튿날인 27일 풀렸다.

시리아 대선 투표일인 지난달 26일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 두마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투표를 마친 뒤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두마=AP 연합뉴스

시리아 대선 투표일인 지난달 26일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 두마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이 투표를 마친 뒤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두마=AP 연합뉴스

“(선거 5일 전인) 19일 시리아 정부가 쿠르드 당국에 대선 투표 실시 협조를 요청했다”는 중동 문제 전문 매체 ‘알 모니터’의 27일 보도를 보면 양측이 비공식 접촉을 통해 이 문제를 상의한 듯하지만, 결과적으로 양측의 좁힐 수 없는 정치적 거리를 재확인한 꼴만 됐다. 북동부 지역은 2014년 대선 때도 쿠르드 정당인 ‘민주연방당(PYD)’ 이름으로 선거를 보이콧한 바 있다. 자치를 인정하지 않는 아사드 정부의 요식 행사에 들러리가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로자바의 잇단 ‘대선 보이콧’에는 양측 정치적 이견 사이의 무한한 거리를 반영하고 있다.

SDF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성향을 지닌 무장 정치 세력으로 분류되지만, 세속주의나 젠더 평등 같은 비교적 진보적인 의제들을 내걸고 ‘새로운 민주연방제’ 정치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왕정주의나 이슬람주의, 그것도 아니면 ‘범아랍 민족주의’ 같은 상대적으로 억압적 성격의 정치 이념으로 뒤덮힌 중동의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의미심장한 관찰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범아랍 민족주의를 기본 이념으로 삼는 아사드 정권과는 출발부터 다른 세력이 SDF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전략적 공조 관계를 유지해 온 게 사실이다. 아사드의 아버지 하페즈가 통치 기간(1970~2000년) 동안 시리아 쿠르드의 멘토 격인 터키의 ‘쿠르드노동자당(PKK)’에 은신처를 제공했던 건 억압받는 쿠르드에 대한 연민이나 연대 성격이 아니라 대(對)터키 외교 전선에서 SDF를 지렛대로 삼으려는 의도에서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분석이다. SDF도 반(反)아사드 무장 반군으로 출발했지만 이슬람주의로 기울며 일부 터키 용병으로 전락한 시리아 무장 반군들의 집요한 공격을 받는 전선에서는 아사드 정권과 전략적 동반자가 돼 손을 잡았다. 이런 이해 관계 때문에 SDF가 아사드 정권 전복을 군사적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다른 반군 조직들에 SDF가 독재자 아사드와 손잡는 배신자 혹은 기회주의자로 비치는 이유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 우선 SDF와 북동부의 친(親)아사드 민병대 ‘디파 알와타니(NDF)’ 간 무력 충돌이 잦아졌다. 로자바와 아사드 양측의 정치적 괴리가 잠재돼 있던 군사적 갈등이 가시화하면서 벌어지는 형국이다. 2012년 11월 창설된 NDF는 예비군들이 대거 가담하고 있는 전국 규모의 민병대 조직이다. 지역마다 현지의 자발적 참여자들을 흡수한 지역 민병대적 성격도 강하다.

시리아 북동부 터키 국경 인근에서 지난달 25일 쿠르드족 어린이들이 순찰 중이던 미군 병사 앞에서 사진 촬영용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시리아 북동부 터키 국경 인근에서 지난달 25일 쿠르드족 어린이들이 순찰 중이던 미군 병사 앞에서 사진 촬영용 포즈를 취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지난해 말부터 간헐적으로 충돌해 오기는 했지만 4월 20일 밤부터 4일간은 양측이 크게 부딪쳤다. 북동부 중심 도시인 카미슐리의 알테이 구역이 핵심이었다. SDF의 특수경찰 ‘아사이쉬’ 측 설명에 따르면 압둘 파타 알라유 NDF 사령관이 SDF 검문소를 지키던 아사이쉬 대원 칼리드 하지라는 인물을 총격 살해하면서 충돌이 시작됐고, 최소 NDF 대원 10여명과 아사이쉬 대원 1명이 숨졌다. 충돌은 같은 달 25일 러시아의 중재로 일단락됐고, 아사이쉬가 트위터를 통해 알테이 구역 통제권을 전면 획득했다고 선포하며 휴전 약속도 준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당일 밤에도 소규모 충돌은 이어졌다. 더욱이 검문소 충돌을 촉발시킨 알라유 사령관에게는 별다른 처벌이나 제약이 주어지지 않았다. 갈등 요인이 여전하다는 이야기다.

4선 대통령이 된 아사드는 이제 20년을 넘어 더 길게 집권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3년 전인 2018년 5월 29일 그는 자신의 든든한 지원군 러시아의 국영 방송 러시아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지금 시점에서 시리아 전쟁의 유일한 골칫거리는 SDF”라고 말한 적이 있다. SDF의 북동부 자치를 마냥 묵인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시사된 발언이었다. 적대 세력으로 둘러싸인 북동부 로자바의 모든 실험은 시리아 전쟁이 정치적 해결을 보지 않는 한 앞으로 도전적인 상황에 계속 놓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 31일 시리아 북부 알레포 지방 만비즈에서 발발한 반SDF 시위은 그런 맥락에서 주시해야 할 사건이다. 만비즈는 수니파 아랍계가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지역이다. SDF는 이곳에서 만비즈군사협의회(MMC)라는 지역 자치 기구 건설에 핵심 역할을 했고, 여전히 MMC의 중추 세력이기는 하다. 그러나 1일 현재 계속되고 있는 만비즈 반SDF 시위는 북동부 정세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올 전망이다. 아사드는 물론 터키 지원 반군들 입장에서도 유용한 카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이유경 국제분쟁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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