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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자 물길에 골목이 99개… ‘강남제일촌’이라 불리는 이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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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송의 유학자 주희가 ‘정감쌍현리(呈坎??里), 강남제일촌(江南第一村)’이라 극찬했다. 장쑤·안후이·저장·장시·푸젠성 등 일대 강남에 마을이 얼마나 많을까만, ‘최고의 마을’이란 찬사를 받은 정감은 황산 남쪽 40㎞ 지점에 있다. 건괘(乾卦)인 관음산을 비롯해 팔괘를 뜻하는 8개의 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팔괘촌이라고 부른다. 마을 어귀에 홍등이 무수히 걸렸고 ‘우리의 중국몽(我?的中??)’ 아래 풍년을 뜻하는 ‘펑(?)’이 보인다. 가을이면 고추나 옥수수, 호박 등을 말리는 쇄추(?秋) 행사가 열리는 광장이 있다.
동한 말기 삼국시대 이후 마을이 조성됐다. 원래 지명은 용계(龍溪)였는데 당나라 말기 나천진 일가가 이주해 정감이라 고쳐 불렀다. 주역에 따르면 감(坎)과 정(呈)은 음과 양을 뜻한다. 일반인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모르겠으나, 음양의 통일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포석으로 마을이 조성된 명당이라 소개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나씨 후손은 송나라 이후 휘주상인으로 성장했다. 휘주의 마을은 대부분 수구(水口)을 조성하고 물이 골고루 흘러가거나 빠져나가도록 배치한다. 풍수지리 관념에 따라 물이 재물을 가져다 준다는 생각이었다. 연꽃이 뒤덮고 있는 영흥호(永興湖)가 부의 원천인 셈이다.
마을에는 두 개의 도랑이 태극처럼 S자 형태로 흐른다. 5개의 거리가 교차해 만든 골목이 99개였다. 촘촘하게 민가가 이어져 있다. 길은 좁고 담장은 높아 미로 같다. 잘못하면 방향을 잃을지도 모른다. 가옥과 사당, 다리와 누각 등 명청 시대의 흔적도 100여 곳이 남았다. 느린 걸음으로 고풍스러운 골목을 따라 세월의 연륜을 느껴본다. 역사 속으로 들어가 기록을 살피니 정감은 인재도 많이 배출했다. 첫머리에 주희가 쌍현(雙賢)이라 존경한 두 인물이 다가온다. 북송과 남송 시대의 나여즙과 다섯째 아들 나원이다. 아버지는 대학사와 이부상서를 역임했고 아들은 지방 관리이자 사지(史志) 연구가로 유명했다. 주희는 나원을 굉장히 존경했다. 다만 나여즙은 민족 영웅 악비를 모함한 진회에 협조했다. 나원은 평생 악비 사당에 참배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주희는 송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사는 마을이라 평가했다.
미로를 벗어나니 도랑이 흐른다. 다리에 그림 그리는 학생이 옹기종기 앉았다. 가랑비를 피하기 위해서다. 하얀 담장과 검은 기와로 상징되는 분장대와(粉?黛瓦) 가옥을 도화지에 담고 있다. 수다를 떨기도 하고 멀리 시선을 겨누기도 한다. 선으로 스치듯 그리는 시간의 길이만큼 고스란히 백지를 채우고 있다. 휘주 마을은 어디나 화가 지망생을 위한 공간이다. 같은 자리에 앉아 바라보는 방향이 일치하더라도 붓끝의 생명은 서로 다른 법이다. 음양오행이나 팔괘의 기운을 담을 수 있다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점괘를 직접 그리지 않더라도 팔괘촌 분위기가 묻어나면 말이다.
마을 북쪽에 정정나동서선생사(貞靖羅東舒先生祠)가 있다. 국무원이 관리하는 국가급 건축물이다. 명나라 시대인 1522년에 선조인 나동서를 봉공하려고 건축을 시작했다. 우여곡절이 많아 1617년에 이르러서야 침전까지 완성해 준공했다. 나동서는 송말원초(宋末元初)의 시인이자 학자다. 서예가인 황정견의 기재와 유학자 구양수의 현명을 지녔다는 인물이다. 문장가로 세상을 밝혔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사당 입구는 7칸 크기의 나무로 만든 문이다. 가운데로 들어서면 편액이 보인다. 명나라 시대 병부상서를 역임한 곽자장의 필체가 있었으나 문화혁명 시기 훼손됐다. 국가문물국 소속으로 고건축학자인 뤄저원이 썼는데 여러 번 볼수록 정감이 붙는다. 둥근 포고석(抱鼓石)과 문신이 ‘강남제일명사(江南第一名祠)’라는 칭찬과 잘 어울린다.
위패가 있는 전각에 이윤유서(?倫攸?)가 걸렸다. 스스로 드러나는 금빛 조명이라 다소 어두워도 또렷하게 보인다. 명나라의 서화가로 유명한 동기창이 썼다. 서경 ‘홍범(洪范)’ 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윤’은 법도와 삼강오상(三綱五常)이며 인재를 선발하거나 관리를 발탁하는 기준이다. ‘유서’는 유교의 도리를 잘 따르고 후대 양성에 힘쓰라는 의미로 읽힌다. 사서와 오경의 묵직한 충고가 느껴져 조금 답답하다.
침전에도 유교를 담았다. 보륜각(寶倫閣)이다. 11칸 크기의 대형 전각이다. 9칸까지 벽화 채색이 끝날 즈음 갑자기 공사가 중단됐다고 한다. 민간은 황색 사용을 금지하라는 칙령이 내렸다. 게다가 전각 오어(鰲魚)의 머리가 마치 용머리로 보여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이다. 선조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미고자 했던 파격이었다고 전해진다. ‘큰일을 당했다’는 기록만 있는데 분명 누군가 고초를 겪었다. 70년 후 완성됐다. 준공 후 휘주의 유명인사이자 효자로 알려진 오사홍이 편액을 썼다.
마침 건축물의 내부를 조사하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조명을 설치하고 플래시를 들고 노트북에 무언가 기록하고 있다. 작업을 방해하지 않게 조용히 들어가 살펴본다. 들보 문양이나 황금빛 여운도 드러나고 기둥과 들보, 까치발의 목조도 명품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처음 지을 때는 단층이었다고 한다. 사법부의 수장 격인 대리사경(大理寺卿)을 역임한 22세손 나응학이 귀향 후 공사를 재개할 때 한 층을 더 높였다. 70년의 세월 동안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재력이 풍부해졌거나 권위가 생겼을지도 모르고 규정도 변했을 듯하다. 수백 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예술품을 후대에 전했다.
사당을 나서니 도랑 위로 빗물이 살며시 점을 찍고 있다. 흐린 날씨에도 분장대와는 반영까지 생생하다. 멀리 뒤돌아보니 안개가 팔괘의 산을 넘어 황산까지 이어진 듯하다. 상하이미술대학 교장을 역임한 유명 화가 류하이쑤는 ‘황산에 오른 후라면 정감에 가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황산을 보면 오악을 볼 필요가 없고 정감에 오면 휘주 마을을 갈 필요가 없다’는 말이 회자하고 있다. ‘강남제일촌’ 정감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휘주 마을이 셀 수 없이 많다.
동남쪽으로 30km 떨어진 웅촌(雄村)으로 간다. 안후이성에서 발원하고 저장성을 통과해 바다로 흘러가는 신안강(新安江)을 따라간다. 강변 마을이다. 원나라 말기에 조씨 일가가 이주할 때 홍촌(洪村)이라 불렸다. 나뭇가지가 휘날리고 잎이 흩뿌리는 모습이 웅장해 웅촌으로 이름을 바꿨다. 마을의 주도권을 잡고 집성촌이 됐다는 말이다. 입구부터 지분엽포소재위웅(枝分葉布所在?雄)이라 자랑하고 있다. 적홍관일수근기향(赤虹貫日誰近其馨)도 나란하다. 붉은 무지개가 해를 뚫고 나오니 누구라도 그 향기에 다가갈 수 있는 마을이다. 그다지 큰 마을이 아니다. 안쪽으로 들어서니 패방 하나가 우뚝 서 있다. 빛이 휘날릴 정도로 줄줄이 작위를 받았다는 광분열작(光分列爵)을 새겼다. 청나라 건륭제 시대인 1762년에 세웠다. 각 성에 파견되는 행정장관인 순무(巡撫)를 중승이라 한다. 조씨 가문에서 중승을 많이 배출해 대중승방(大中丞坊)이라고도 한다.
청나라 초기에 조씨 가문은 염상(鹽商)으로 거상이 됐다. 휘주 상인의 공통점은 생활이 부유해지면 관직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는 것이다. 거상과 고위 관료를 배출하는 경우가 많다. 1756년에 죽산서원(竹山書院)을 세웠다. 조문식이 호부상서에 올랐고 건륭제 시대의 국가 프로젝트인 사고전서(四庫全書) 편찬에 참여하는 영광을 누렸다. 무엇보다 ‘베이징오페라’인 경극의 비조로 더 유명하다. 오늘날 장관급에 해당하는 고위 관료가 대중 공연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연이 흥미롭다.
풀밭에 조문식이 만든 공연 단체 경승반(?升班)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있다. 1760년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맞아 배우를 데리고 상경해 8편의 공연을 펼쳐 극찬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휘극이 경극의 모태가 됐음을 알려주고 있다. 조문식은 왜 고향에 무대를 꾸몄을까? 관직을 내려놓고 귀향하는 도중에 양주를 찾았다. 쿤산에서 시작돼 장쑤성을 대표하는 곤극 배우들을 수소문했다. 어린이와 노인으로 구성된 팀을 데리고 고향에 왔다. 노모에게 공연을 보여주기 위한 효심의 발로였다. 공연단 이름도 화염(?廉)이라 지었다. 그런데 노모가 대사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지방 사투리였기 때문이다. 문화권 차이가 있어 줄거리도 낯설고 배우의 동작에도 불만이 있었다. 음악과 무대에 조예가 깊은 교사를 초빙해 훈련을 거듭했다. 웅촌의 촌부도 즐거워하는 연출로 새로운 무대극이 탄생했다. 노모도 기뻐했다.
북쪽 10km 지점에 후이저우고성(徽州古城)이 있다. 핑야오, 리장, 낭중과 함께 4대 고성이다. 휘학(徽?)의 발상지로 ‘동남의 추노(鄒魯)’이자 ‘예의지방(禮儀之邦)’이라 불린다. 맹자와 공자가 살았던 추나라와 노나라를 비유한다. 성리학과 상업이 겸비된 휘상(徽商)의 고향이다. 고성에는 4개의 문이 있다. 서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6현을 관할하던 휘주부(徽州府)가 있다. 진상(晋商)의 중심인 핑야오고성(平?古城)의 관청보다 규모도 작고 볼품이 없는 편이라 아쉽다.
고성의 랜드마크인 패방이 나타난다. 대학사를 역임한 허국의 위상을 보여주는 팔각석방(八脚石坊)이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1584년에 건축했다. 사각형으로 정면에서 보면 기둥이 4개로 너비가 11.54m다. 측면에서 보면 기둥이 2개로 너비가 6.77m다. 3층 구조로 높이는 11.4m이고 면적은 78.13㎡이다. 기둥 8개에 사자가 있고 측면 양쪽에 2개씩 더 있어 모두 12개의 사자가 노려보고 있다.
패방 안에 들어가 위로 바라보면 크기나 모양이 훨씬 웅장하다. 하늘이 훤히 뚫려 있어 3층 지붕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두 마리 용 사이에 황제의 은총을 받았다는 은영(恩?), 그 바로 아래에 대학사를 새겼다. 사면의 안과 바깥까지 8번이나 썼다. 허국의 관직을 길게 적고 있다. 소보겸태자태보예부상서무영전대학사허국(少保兼太子太保禮部?書武英殿大學士許國)이다. 무영전은 베이징 고궁의 태화문 서쪽에 위치하는 전각이다. 명나라 초기에는 황제가 신하를 친견하는 장소였다가 이후 내각의 집무실이었다.
허국은 가정제 시대 진사가 됐다. 2년 후 초임 시절인 1567년 융경제가 등극하자 조서를 지니고 조선에 사신으로 온 적이 있다. 쓰고 온 갓이 꽤 멋있었던지 한때 유행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만력제 시대인 1583년 윈난 일대에 일어난 반란의 평정에 기여했다. 이듬해 관직을 내려놓고 귀향한 후 석방이 건축됐다. 상대원로(上台元老)라고 적었다. ‘상대’는 태보와 소보 등 고급 관직을 역임한 경우에 사용한다. ‘원로’는 3명의 황제를 거친 중신이었다는 영광을 드러낸 말이다. 반대쪽에는 선학후신(先?后臣)이 적혀 있다. 허국처럼 신하가 되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관리가 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을 터, 올려다볼수록 그저 딴 세상 같다.
허국처럼 공부를 많이 한 인물이 또 있다. 대학자 궈모뤄가 “2,000년 전에 공자가 있었고, 2,000년 후에 타오싱즈(陶行知)가 있다”고 말했다. 후이저우에서 태어나 미국에 유학한 교육사상가다. 1935년 중국공산당이 항일 민족통일전선을 제안한 ‘팔일선언’에 감동했다.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비판하고 항일 구국 운동에 나섰다. 공자의 다른 이름인 만세사표(萬世師表)가 보인다. 제부이기도 한 장제스를 무지하게 증오한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이 썼다. 공자에 비견되는 사상가라고 극찬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고성의 골목인 두산가(斗山街)로 들어선다. 명청 시대의 휘상 저택이 많다. 역사라는 기억을 간직한 한적한 길이다. 가옥마다 조각으로 단장하고 있어 후이저우 문화가 곳곳에 숨 쉬고 있다. 1급 역사문화거리라 저택 안에 인적은 사라졌다. 몇몇 민가에는 여전히 사람이 살고 있다. 50년이 지났어도 담벼락에는 문화혁명의 흔적이 남았다. 붉은 낙인은 쉽게 씻기지 않았고 유물인지 교훈인지 모를 ‘세월’을 그냥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주민들도 그저 무덤덤하게 지나간다. 하기야 수백 년을 이어온 휘주 문화를 일상의 품에 안고 살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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