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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세대 '공정' 요구 분출하는데... 지지부진한 文정부 '직무급제 확대'

입력
2021.06.04 04:30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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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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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30대 A씨. 연초 회사로부터 '직무기술서'를 작성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입사한 순서대로’가 아니라 ‘맡은 업무에 따라’ 월급을 달리 주는 직무급제 도입을 위한 조치라 했다. A씨는 기쁘게 써냈다. ‘출근해서 커피 마시며 대충 주식 좀 보다 퇴근하는 상사’와 ‘정작 일이란 일은 다 해야 하는 부하 직원’ 구도에 대한 불만, '그런데 상사는 두세 배씩 월급을 더 받더라'는 불만에 공감해서다. 직무급제가 해법이 되지 않을까라는 게 A씨 기대다.

물론 쉽지는 않다. 도입 초기다 보니 직무 분석 결과를 두고 의견이 엇갈리고 이 때문에 이런저런 다툼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A씨는 낙관적이다. “요즘 우리 세대는 연봉 문제가 생기면 바로 사장에게도 이메일을 보내고 입사할 때도 업무에 대한 보상이 공정한지를 따지거든요. 아직까지 체계가 완전히 갖춰졌다고 보긴 어렵지만, 컨설팅 업체 등을 통해 직무 분석 내용을 계속 고치고 있으니 빨리 정착되지 않을까요."

일한 만큼 받는 직무급제가 공정에 목마른 MZ세대(밀레니엄세대+Z세대·1980~2000년대 출생)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다. 직원들은 왜 이익을 충분히 공유받지 못하느냐는 SK하이닉스 성과급 논란, 생산직 아닌 사무직 노조 설립 열풍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도입은 지지부진하다. 문재인 정부의 대선 공약 중 하나가 젊은층 일자리 확보와 불평등 완화를 위한 '직무급제 도입과 확산'이었음에도 그렇다.

3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직무급제를 도입한 100인 이상 사업장은 35.9%에 불과했다. 문 정부 출범 초기인 2017년 6월 33.1%에 비하자면 고작 2.8%포인트 정도 늘어나는데 그쳤다.

다급해진 정부는 공공기관에라도 직무급제를 확산시키기 위해 올해부터 직무급제를 하면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가점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지난 1일 기준 직무급제를 전면 도입한 곳은 전체 340개 중 약 10여 곳에 그친 것으로 추정된다. 비율로 따지자면 고작 3%대다. 그나마 이들 대부분은 '500인 미만' 혹은 '노동조합이 없는', 소위 작고 힘없는 기관들이다. 현 정부 들어 세 번째로 구성돼 곧 활동에 들어갈 노사정 합의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도 직무급제 도입 문제를 논의하겠지만, 힘을 받기는 어렵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직무급제란, 말 그대로 직무가 △얼마나 어려운지(난이도) △시간과 체력이 얼마나 쓰이는지(업무 강도) △책임이 얼마나 큰지(중요도)에 따라 임금을 달리 주는 체계다. 성과나 직무에 관계없이 입사 연도만 같으면 월급이 함께 오르는 연공서열식 호봉제와 달리, 일의 양이 적고 업무의 중요도가 떨어지거나 책임이 덜할 경우 고연차라 해서 자동적으로 고임금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실제 직무급제는 MZ세대에게 '당근'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포스코 하청업체로 대기 및 수질 설비 관리 일을 하는 ㈜청인은 지난 3월 직무급제 도입을 통해 조직을 혁신했다. 소규모 기업이다 보니 사람들 간 친분에 따라 일하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는 불만이 속출했다.

컨설팅 지원을 받아 직무 분석을 했고, 이에 맞춰 월급 체계를 다 뜯어고쳤다. 청인 관계자는 “기계정비직 같은, 고된 일이지만 대우는 잘 못 받는 직무에 대해 보상을 강화하자 직원들 사이에서 '공정하다'는 평이 나왔고, 이런 평가가 숙련도 향상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다"며 "덕분에 노사관계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지금은 매출액 증대로 이어질 것이라 기대하고 있는 상황"이라 말했다.

“한국 실정에 안 맞다”… 노동계의 거센 반대

민주노총 공공연대노조 관계자들이 지난해 6월 9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앞에서 '2021년도 공무직 처우개선 예산반영 촉구 직무급제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 제공

민주노총 공공연대노조 관계자들이 지난해 6월 9일 정부세종청사 기획재정부 앞에서 '2021년도 공무직 처우개선 예산반영 촉구 직무급제 반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민주노총 제공

하지만 공공부문이건, 민간부문이건 직무급제의 성공 사례는 외국계 기업이나 작은 기업, 아니면 작고 힘없는 조직 이야기에 그친다. 무엇보다 노동계의 거센 반발이 있고, 이를 의식한 정부와 기업 모두 몸을 사리기 때문이다. 노동계가 반발하는 이유는 한마디로 '한국 실정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우선 기업 측의 비용 절감에 악용될 수도 있다. 이지현 한국노총 대변인은 “연공 서열식 호봉제에 대한 안정적 기대가 있는 상태에서 급격히 직무급제를 도입하면 임금이 깎이거나, 앞으로 기대만큼 임금이 오르지 않아 사실상 임금이 깎이는 노동자들의 저항이 심할 것"이라 말했다. 직무급제와 호봉제 사이에 '낀 세대'에 대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또 기수별 공채 중심의 한국식 조직 문화와 맞지 않다. 해외 기업들은 직무에 맞는 사람을 그때 그때 찾아 넣는, '핀셋형 상시 채용' 형태다. 해당 직무에 대한 전문성, 권한, 책임을 넓게 인정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중견기업 이상은 대부분 공채를 한 뒤 순환보직을 한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한국은 정해진 직무에 맞는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똑똑한 사람을 찾은 뒤 직무를 맡기는 방식"이라 말했다. 이런 조직문화에서 같이 입사한 동기인데 '직무가 다르니 당신은 얼마, 당신은 얼마'라고 하면 받아들이겠느냐는 얘기다. 홍석환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직무급제를 하려면 임금체계뿐만 아니라 채용, 인사 등 노동조건 전반에 대해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문제를 떠나 아예 인사보복에 악용되리라는 우려도 나온다. 가령 노조 활동 등을 통해 밉보인 직원을 가장 직무 가치가 낮은 곳으로 보내 임금을 깎아버리는 형태다. 하종강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는 “우리의 인사·노무관리 체계는 업무 능력이 뛰어나도 입바른 소리를 한 부하 직원에 대해 가혹한 경향이 있다"며 "이런 경향이 여전한데 직무급제가 도입되면 잘못 이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설득나서기보다 몸만 사린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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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직무급제를 확산시키려면 정부라도 적극 나서야 한다. 공공부문에서 성공 사례를 만들어낼 필요가 있다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하지만 공공기관 직무급제도 ‘무늬만 직무급제’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는다.

직무급제가 도입된 한 공공기관에 재직 중인 30대 B씨는 “직무 구별이 모호해서 결과적으로 호봉제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꼬집었다. B씨가 일하는 공공기관은 직무 난이도, 전문성 등 요건에 따라 5개 등급으로 나누고 이에 맞춰 임금을 지급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B씨는 “직무급이라면 맡은 직무에 따라 월급이 달라져야 하는데, 우린 같은 등급이면 직무가 달라도 같은 월급을 받는 방식"이라며 "직무급을 한다 했지만 조직 체계가 여전히 사원·대리·과장으로 되어 있다 보니 생긴 일"이라 말했다.

정부도 딱히 팔 걷어붙이고 나설 생각은 없어 보인다. 고용부 관계자는 “직무급제는 결국 노사 합의 사항이기에 정부가 개입하기 어렵다"며 "경제사회노동위원회와 같은 사회적 대화 기구를 통한 홍보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밀한 직무 분석부터… 장기간 ‘사회적 대화’ 중요

직무급제 도입을 위해서라면 지금이라도 정부가 산업 전반에 대한 '직무 분석 가이드라인'이라도 내놔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공공부문부터 적용해 성공 사례를 만들고, 이후 민간영역에서 도입을 시도한다면 그에 맞는 인사·채용 체계 개편 방안 등에 대해 컨설팅 기능도 수행해야 한다. 또 호봉제에서 직무급제로 이행할 때 중간 단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지 노사정 차원에서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채준호 전북대 경영학과 교수는 “노동계의 가장 큰 우려는 직무급제로 인해 결국 '생애 총 임금'이 줄어들 것이라는 부분"이라면 "논의의 테이블을 열기 위해서라면 우선 '직무급제 도입으로 인해 생애 총 임금은 변하지 않는다'는 약속부터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임금체계 개편은 명확한 상대가 있는 민감한 문제이므로 ‘공정한 저울’을 만들어야 하고, 공정한 저울을 확신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저울에 올라올 때 수용성도 높아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결국 장기과제인데, 장기과제라 해서 계속 미루다간 이뤄질 수 있는 건 없다. 지금부터라도 준비할 것은 준비해야 한다. 채 교수는 “단기간에 성과를 보겠다는 취지로 직무급제에 접근하면 노사갈등이 첨예화되는 등 부작용만 커질 것”이라며 “공공부문에서 시작하되 논의 자체는 민간도 함께 참여하고, 임금의 연공성과 직무중심 체계 등을 전반적으로 함께 논의할 거버넌스 기구가 필요한 사안”이라고 제안했다.

김청환 기자
이정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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