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먹인 언니들과 육개장 한 그릇

입력
2021.06.01 04:3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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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윤 '달밤'(웹진 비유 6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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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사 먹을 수 없는 게 없는 도시였다. 단돈 2,000원이면 간단하게 한끼를 해결할 수 있는 컵밥부터 메뉴 목록이 끝이 없던 김밥천국, 영양성분을 고루 안배한 편의점 도시락까지. “밥 잘 챙겨먹어라”는 고향 부모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배 곯을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종종 참을 수 없는 허기가 몰려왔다. 식욕 탓이 아니었다. 한 스푼의 걱정, 한 스푼의 사랑이 담긴 음식을 온전히 나만을 위해 차려 줄 사람이 이 도시에 없다는 깨달음에서 오는 허기였다. 내 생일에 토란대가 흐물거릴 때까지 뭉근하게 끓인 오리탕을 만들어줄 사람은 세상에 하나뿐이니까.

웹진 비유 6월호에 실린 안윤의 ‘달밤’을 읽으며, 그래서 나는 자꾸만 허기가 졌다. 단 한 사람만을 위해 육개장을 끓이는 마음을 생각하다가 덩달아 그리운 사람들이 함께 떠올라버려서.

‘나’는 생일을 맞은 소애를 위해 육개장을 끓이는 중이다. 소애와 내가 가족이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함께 했을 뿐이다. 하지만 시를 쓰던 나와, 노래를 만들고 부르던 소애는 자연스레 이 도시에서 서로에게 온기를 나눠주는 사이가 됐다.

온갖 음식이 한 시간 내에 집 앞까지 배달되는 대한민국에서 직접 만든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리는 것은 번거롭고 또 비싼 일이다. 그래도 그 번거로움을 기꺼이 감수하고서라도 직접 한 상 차려주고 싶은 마음이 애정의 정체다. 육개장, 미역국, 밥, 시금치 무침, 콩나물 무침, 무나물, 애호박전, 두부 부침, 찹쌀떡, 절편, 딸기, 그리고 냉동실에서 막 꺼낸 차가운 소주까지. 소애와 나는 흡사 잔칫상 같은 생일상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는다. “축하해, 태어난 거, 살아온 거, 살아있는 거, 다.”

안윤 작가. 작가 제공

안윤 작가. 작가 제공


사실 이날 상에는 수저 한 벌이 더 놓여 있다. 내가 소애를 먹이듯, 나를 먹였던 은주 언니를 위한 수저다.

“언니는 희곡 써서 받은 돈, 시나리오 써서 받은 돈, 다른 일로 번 돈 말고 글 써서 번 돈이 생기면 꼭 나한테 밥을 사 줬어요. 일본식 돈가스 정식이나 양념갈비, 해물탕 같은 걸 사 주면서 늘 그랬잖아요. 아프지 마. 안 아픈 게 최고야. 요즘 내가 소애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그거예요. 아프지 마. 안 아픈 게 최고야.”

소설은 언니가 내게 준 마음을 내가 다시 소애에게 나눠주는, 서로를 잘 먹이는 것으로 한 시절을 버틸 힘을 나눠가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가는 후기에 이렇게 덧붙였다. “밥을 사 먹이며 아프지 말라고 말해주던 언니들이 있다. 지금 내 모양의 상당 부분을 빚어 준 언니들. 이제는 나도 누군가의 언니가 되어서 언니라고 불린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언니들이 있었다. 월급날이면 꼭 불러내 비싸고 좋은 것들을 사 먹이던 언니들. 그 마음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 지금의 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맛있는 밥 한끼를 산다면, 그건 모두 언니들에게 받은 것을 갚는 일일 뿐이다. 이제 나도 이 말을 돌려줄 때다. 축하해, 태어난 거, 살아온 거. 아프지 마, 안 아픈 게 최고야.

한소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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