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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좋아 플랫폼 노동이지

입력
2021.05.31 22:00
수정
2021.06.01 09:51
27면
지난달 2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열린 라이더 안전·생존권 보장 집회. 연합뉴스

지난달 2일 서울 송파구 쿠팡 본사 앞에서 열린 라이더 안전·생존권 보장 집회. 연합뉴스


아침에 일어나서 핸드폰을 확인하니 밤 11시에 부재중전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야심한 시간 전화는 짜증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남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사람의 전화거나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한 라이더의 전화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씻고 나왔더니 그 사이 같은 번호로 부재중전화와 문자기록이 남았다. 수건으로 물을 훔치며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연결되는 동안 마음속으로 외쳤다. ‘별일 아니기만 해봐라!’

해고 통보를 받았다. 두 개의 매장을 가진 치킨집 사장님 밑에서 1년 가까이 배달 일을 했는데, 사장이 요즘 장사가 안 된다며 나가라고 했다. 일당을 받는 형식이었지만,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이기 때문에 사업주가 함부로 해고할 수 없다. 30일 전 해고 예고를 하거나, 당장 자르고 싶으면 30일치의 통상임금을 수당으로 지급해야 한다. 정당한 해고의 절차를 거친 것도 서면통보를 한 것도 아니라 5인 이상 사업장이면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상담자는 근로기준법이라는 무기를 드는 것을 주저했다. 오랫동안 얼굴을 본 사이에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장들을 옥죄고 경직되어 있다고 비난 받는 노동법은 현실에서 훨씬 무르고 유연했다.

부산에서는 오토바이를 렌트해서 일을 하던 배달대행 라이더가 사고가 났다며 상담요청을 했다. 렌트 회사가 오토바이 보험을 다른 사람 명의로 들어놓아서 보험사가 보상을 거부한 사건이었다. 라이더는 사고가 난 상대방의 치료비와 수리비 수백만 원을 책임져야 했다. 배달대행사 사장은 모르는 일이라고 했다. 보통 동네배달대행사 사장이 일을 하려는 라이더와 오토바이 렌트 계약서를 쓰고, 렌트회사에 보낸다. 라이더는 사장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에 서명을 할 뿐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았다. 심지어 계약서를 노동자에게 쥐여 주지도 않았다. 아무리 위탁계약이라고는 하지만, 배달노동자를 사용해서 돈을 버는 사장이 렌트 계약내용을 확인조차 하지 않은 것이 의아했다. 사장에게 민사소송을 거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어 보였지만, 라이더는 얼굴 보고 일하던 사장과 척을 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낡았다고 비난 받는 노동법에서 해방된 배달대행 라이더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없어 보였다.

지난 몇 년간 플랫폼 때문에 새로운 노동문제가 발생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보호대책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위의 두 사례에서 새로운 플랫폼 기술 때문에 발생한 문제는 없다. 노동법이 있어도 노동자는 손쉽게 잘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노동상담전화를 건다. 플랫폼을 사용하는 배달대행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근로계약서가 있어도 해결하기 힘든 노동의 문제를, 동등한 개인 간의 거래를 전제하는 위탁계약서가 해결해줄 리 없다.

알고리즘 배차와 평점시스템이 그나마 새롭다고 볼 수 있지만, 과거 매니저들이 전화로 하던 지시와 업무평가를 프로그램이 대체했을 뿐이다. 알고리즘은 최소한 욕은 하지 않으니 진보라면 진보다. 플랫폼 노동이라는 말은 오프라인에서 해결하지 못한 노동의 문제를 온라인 세계에 어지럽게 훌뿌려 놓은 것뿐이다. ‘플랫폼’이라는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야심한 시간 노동상담을 위해 전화를 걸어야 했던 노동자의 절박한 목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없을 것이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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