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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나이와 사법의 정치 오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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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진보의 아이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연방대법관은 미국 진보진영에 아픈 선례다. 오바마 2기 정부 때 그는 후임으로 진보 대법관 지명이 가능하도록 은퇴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그는 “훌륭한 대통령이 당선되길 희망한다”며 압력을 물리쳤지만, 현실은 진보 대법관이 임명될 것이란 그의 희망과 달랐다. 작년 86세를 일기로 타계하자 트럼프 정부는 보수 법관을 후임에 앉혔고, 대법원 구성은 보수 대 진보가 5대 4에서 6대 3으로 기울어졌다.
□ 진보진영은 이번에는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을 압박하고 있다. 클린턴 정부 시절 임명된 그는 82세로 대법관 중 최고령이다. 바이든 정부가 후임을 임명토록 용퇴해 긴즈버그의 선례를 반복하지 말라는 요구에 직면했다. 종신직인 대법관들이 정치적 은퇴를 결행하는 경우가 없진 않다. 존 폴 스티븐스 대법관은 90세 되던 2010년 오바마 정부에서 은퇴했는데 보수가 싫어 민주당 정부 때까지 기다려 물러났다. 하지만 브레이어는 사법에 대한 정치공학적 셈법에는 관심이 없다.
□ 그는 4월 하버드 로스쿨 강연에서 사법부에 중요한 것은 당파성의 탈피이며, 판사들은 자신을 임명한 정당이 아니라 법치에 충실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내용이 사전 공개된 그의 책 ‘사법권위와 정치위험’에선 정치 개입이 사법 신뢰를 훼손하고, 권위를 상실한 사법부는 더는 정부 견제자, 법 지배의 파수꾼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논리대로면 브레이어에게 정치적 은퇴는 그간 판결이 정치적 결정임을 고백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 지혜의 아홉 기둥으로 불리는 대법관들은 기념비적 판결로 미국 사회를 성숙시키는 한편 미국의 양심을 지켜왔다. 지금은 정치에 오염돼 법복 입은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실제 보수·진보 대법관 구도는 보수·진보 정권이 임명한 대법관 수와 일치한다. 그래서 보수로 기운 대법원은 48년 전 허용된 여성의 낙태를 불법화할 수도 있다. 브레이어의 사법적 당위론은 명쾌하지만 현실은 훨씬 비참할 수 있다. 대통령 임기 5년, 대법관 임기 6년에 정년 70세가 만드는 정치적 변주에 휘둘리는 우리 사법부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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