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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이 필 때면…

입력
2021.05.28 22:00
23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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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민한테서 이메일이 왔다. 늘 그렇듯 다정한 개인사가 길게 이어졌다. 이스탄불 외곽에 방 여덟 개가 딸린 석조주택을 장만했다고 했다. 호들갑 떠는 자랑질에 마음이 뚱했던 것도 잠시, 실은 자신이 머물 게 아니라 작가들의 집필실이나 해외에서 방문하는 출판인들의 숙소로 내어줄 거라는 설명이 덧붙었다. 지금 그 저택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양귀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고, 코로나19가 잠잠해지면 냉큼 와서 여기 머물다 가라며 나를 꼬드겼다. 아, 양귀비꽃...

그나저나 글로벌 베스트셀러 작가를 수십 명 보유한 거대 에이전시 대표가 직원 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메일을 날린 데에는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나의 최애 작가인 부르한 쇤메즈가 지난해 말 탈고한 장편 소설의 영문 번역원고가 첨부되어 있었다. 원고 파일을 열었다.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은 풍경이 훅 펼쳐졌다. 이스탄불의 오래된 묘역. 옛 연인의 무덤가에 돌집을 짓고 살며 죽은 자들을 위한 비석을 새기는 묘비 장인 아브도가 이름을 일곱 개나 사용했던 어느 군인의 비석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곧 폭우가 쏟아질 듯 기이한 이야기에 사로잡혀 소설을 읽어 가던 내 마음은 어느새 아나톨리아 반도 남쪽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들을 오래 바라보노라면 슬픔이 차오른다. 그때 폐허로 남은 히에라폴리스 유적지의 풀밭에도 빠알간 양귀비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돌무더기 틈으로 뿌리내린 꽃들이 오후의 미풍 아래 흔들리는 풍경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한참이나 그 광경에 취해 있던 나는 홀린 듯 북동쪽 언덕으로 발길을 돌렸다. 거기, 세상 어디서도 만나기 힘든 묘역이 있었다. ‘죽은 자들의 도시’ 네크로폴리스. 기원전 2세기 페르가몬 왕조 때 터를 닦아 헬레니즘과 비잔틴 문명을 꽃피우며 1,500년 넘게 융성하던 ‘성스러운 도시’ 히에라폴리스는 1334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폐허가 됐다지만, 죽은 자들의 도시를 지키는 무덤들은 비교적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다. 저 아래 히에라폴리스의 지나간 영광을 증명하는 1,000여 기 석관 묘들 사이로 가옥형 묘지와 봉분 묘 등 전혀 다른 모양의 묘지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먼 곳에 고향을 둔 이방인들의 묘였다. 무덤 사이를 걸으며 생각했었다. 포기할 수 없는 삶의 욕망을 파묵칼레 온천수 효험에 기대 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을 병든 이들. 하지만 끝내 자신의 몸을 낯선 땅 언덕에 묻어야 할 운명임을 자각했을 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마지막까지 삶을 붙들고 늘어진 자신의 미욱함을 탓했을까, 절절한 기도마저 야멸차게 뿌리친 신을 원망했을까, 그도 아니면 영영 못 보게 된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지었을까?

다시 쇤메즈의 소설 원고로 돌아왔을 때, 이름을 일곱 개 가진 군인이 생전에 부탁했다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아브도에게 비석 제작을 맡긴 병사들은 망자가 자기 묘비에 다음과 같은 말을 새겨 넣으라 말했다고 전했다. ‘신의 유일한 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네르민에게 답장을 썼다. 한국 독자들에게 아브도의 비밀을 들려주고 싶다고, 다만 나는 죽은 군인의 묘비 문구를 믿지 않겠다고. 콕 집어 말하자면, 당신이 장만한 석조주택에 머물며 이스탄불 골목골목을 누빌 날이 어서 오기를 세상 하고많은 신에게 빈다고 말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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