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가습기 살균제 사건, 시간이 없다

입력
2021.05.28 18:00
수정
2021.05.28 20:40
22면

참사 10년째 재판정에 갇혀 논란만 거듭?
?진상규명·처벌과 재발방지 해법 겉돌아?
?사회통합 위한 인프라 구축에 합심할 때

편집자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가습기살균제참사10주기비상행동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가해기업 처벌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회원들은 항소심 공판 준비기일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진행, 가해기업들에 대한 처벌을 재판부에 호소했다. 뉴스1

가습기살균제참사10주기비상행동 회원들이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 앞에서 가해기업 처벌을 촉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이날 회원들은 항소심 공판 준비기일을 앞두고 기자회견을 진행, 가해기업들에 대한 처벌을 재판부에 호소했다. 뉴스1

올해 초 가습기 살균제 재판에서 SK케미칼과 애경산업에 무죄를 선고한 판사는 ‘매판법관’으로 매도됐다. 옥시와 다를 바 없이 숱한 피해자가 발생했는데도 유해성을 입증할 수 없는 성분이라는 이유로 재벌기업에 면죄부를 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의 법관이 노조활동을 무력화한 삼성 사건에서 최고경영진을 법정구속하고 중형에 처한 판결을 내린 정황 등을 감안하면 ‘눈감고 재벌 봐주는 판사’라고 싸잡아 비난하기는 조심스럽다. 재판부가 “향후 추가 연구결과가 나오면 역사적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모르겠다”며 다른 결론의 가능성을 열어둔 만큼 항소심 등 향후 재판과정에서 새로운 증거들이 나와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기만 바랄 뿐이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수면 위로 불거진 건 2011년. 그 뒤로 10년이 흘렀지만 사회적 논란은 여전하다. 최대 가해자로 지목된 옥시가 재판을 통해 처벌을 받은 것과 달리 SK케미칼과 애경산업은 여전히 유무죄를 다투고 있다. 이번 정부 출범 이후로는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를 건네며 피해구제를 약속했고 공정위가 정부의 허술한 대처에 잘못을 인정하는 사과문도 발표했다. 하지만 2018년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한 뒤 아직까지 전체 피해 규모조차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피해자성을 인정받기 위한 피해자들의 고군분투와 달리 정부와 정치권의 해법은 더디기만 하다. ‘안전한 대한민국’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던 민주당과 문재인 정부도 다르지 않다. 지난 대선에 앞서 제시했던 관련 공약 가운데 살생물질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법률(살생물제 관리법) 및 환경범죄이익 환수법 정도를 처리했을 뿐이다. 유해물질의 알 권리 보장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겠다는 공약은 실천하지 않았다. 화학물질의 유해성 평가를 신속하게 하도록 조직을 보강하겠다는 약속 또한 현실화하지 않았다. 인체 유해성이 예상되는 물질의 시판을 허용한 국가 책임에 대한 사과도 충분치 않다.

도리어 사회적참사 특조위의 발목을 잡는 집권 여당의 행태를 보면 해결의지마저 의심스럽다. 지난해 말 특조위 활동 연장을 위한 개정법 논의 과정에서 가습기 살균제 관련 조직을 축소하는 방향을 두고 한차례 소동이 벌어졌다. 상임위원 2명이 논란에 책임을 지고 사퇴한 뒤로 공석이 채워지지 않는 바람에 특조위는 5개월 동안 기능부전 상태에 빠졌다. 후보의 잇단 고사로 인한 인선 난항이라는 설명이지만, 더불어민주당이 여당 몫 공석을 메우는 데 미적대면서 특조위는 추가로 확보한 1년 6개월의 활동시간 가운데 약 3분의 1을 허송세월하고 말았다.

627만 명이 사용한 가습기 살균제. 특조위에 따르면 유해성분에 노출돼 55만 명이 병원진료를 받았지만 피해 신고는 6,817명에 불과하다. 피해규모 확정에만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 가늠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재판정에서 제품의 유해성과 기업의 책임을 따지는 동안에도 피해자의 숨은 가빠지고 폐는 석회처럼 굳어간다. 갈수록 증거의 흔적이 희미해진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시간적 여유가 없다.

사건 해결을 법원에만 맡길 일도 아니다. 개인 차원의 비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괴물로 등장한 세월호나 가습기 살균제가 우리 사회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사회 전체가 책임을 져야 한다. 정부나 가해 기업의 피해구제로 그칠 일도 아니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물론 재발방지를 위한 인프라 구축에 정부와 기업 모두가 나서야 한다. 특히 정치권은 참사의 분노가 사회적 갈등으로 번지지 않도록 사회통합 방안을 너무 늦지 않게 마련해야 한다.

김정곤 에디터 겸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