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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엄태구입니다..." 그리고 그는 말이 없었다

입력
2021.05.26 07:30
수정
2021.05.26 10:56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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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배우의 덜 알려진 면모와 연기 세계를 주관적인 시선으로 전합니다.

배우 엄태구.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역할을 선보이고 있다.

배우 엄태구. 상업영화와 독립영화를 가로지르며 다양한 역할을 선보이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소감이나 감회가 없었다. “시상을 많이 했으니 15년쯤 뒤에 공로상이라도 달라”(배우 권해효)는 너스레도, “뭔 돈이 통장에 들어왔길래 이자인가 했더니 (영화 ‘국도극장’) 출연료더라”(배우 이한위)라는 유머도 없었다. 지난해 수상자로서 남우주연상 시상에 꼭 필요한 말만 했다. “배우 엄태구입니다. 수상자는…” 내내 조용히 앉아있어서 단상에 오르기 전 그가 참석했는지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그는 행사가 끝나자 말없이 사라졌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중구 문학의 집에서 열린 제8회 들꽃영화상 시상식에서 연출된 장면이다. 참석자들은 “엄태구답다”고 입을 모았다.

엄태구는 과묵하다. 말수가 적은 정도가 아니다. 입에 자물쇠를 채워놓은 듯하다. 그는 기자들 사이에서 인터뷰하기 힘든 배우로 유명하다. 배우나 감독 인터뷰를 하면 질문보다 대답이 길기 마련인데, 엄태구는 대답이 훨씬 더 짧다. 한때 대답 대부분을 “네” “아니오”로 일관해 기자들 사이에서 ‘악명’ 높았던 배우 송일국을 연상시킨다. 사람들과 눈을 잘 마주치지도 못한다. 숫기 없는 성격이다 보니 예능프로그램 출연은 생각지도 못한다.

영화에서도 대사가 많지 않다. 얼굴 표정과 몸동작으로 연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사는 그저 보조수단에 그칠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엄태구가 그나마 수다스럽게 느껴졌던 영화는 형 엄태화 감독과 함께 했던 독립영화 ‘잉투기’(2013) 정도다.

엄태구는 영화 '밀정'에서 표독한 일본 형사 하시모토를 연기하며 대중에 얼굴을 널리 알렸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엄태구는 영화 '밀정'에서 표독한 일본 형사 하시모토를 연기하며 대중에 얼굴을 널리 알렸다.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엄태구는 영화 '택시운전사'에 단 한 장면만 출연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쇼박스 제공

엄태구는 영화 '택시운전사'에 단 한 장면만 출연하고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쇼박스 제공

무표정일 때는 좀 무서운 얼굴이다. 눈빛은 날카롭고, 튀어나온 광대뼈가 위협적이다. 부끄러운 듯 살짝 웃을 때 속정이 느껴지는 스타일이다. '츤데레'의 끝판왕이다. 짧게 등장하는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그의 그런 매력이 발휘된다. 그는 택시운전사 김사복(송강호)과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검문소에서 통과시켜주는 박 중사를 연기했다. 그가 사병에게 “보내, 보내라고” 명령할 때 관객은 저 짧은 말의 무게를 가슴으로 느낀다. 박 중사의 간략한 언행에 담긴 깊은 생각을 가늠할 수 있어서다.

넷플릭스에서 지난달 공개한 ‘낙원의 밤’은 엄태구의 내향적인 면모를 최대한 활용한 영화다. 그가 연기한 박태구는 폭력조직 중간 간부인데, 말보다 행동이 앞선다. 박태구는 복수를 단행하고 도피한 제주에서 재연(전여빈)을 만나 연정을 나눈다. 재연이 식당에서 물회 두 그릇을 일방적으로 주문하는데 박태구는 젓가락을 들지 못한다. 박태구는 아무런 말이 없기에 재연은 태구가 물회를 못 먹는 것으로 여긴다. 박태구는 누나랑 물회 먹기를 즐겼다. 누나는 이제 세상에 없다. 박태구는 조용히 물회를 내려다 본다. 태구가 눈물을 흘리거나 자신의 사연을 재연에게 토로하지 않기에 슬픔은 더 깊고 비장감은 진해진다. 말 없음으로 말을 대신하는 엄태구의 이미지가 도드라지는 장면이다.

엄태구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를 가로지르며 활동한다. 독립영화 ‘판소리 복서’(2019)에서 퇴물 복서 병구를 연기했다. 병구는 판소리 장단과 복싱 동작을 연결하려는 인생 목표를 가졌다. 사람들이 관심 두지 않는 운동에다 역시 사람들 눈 밖인 옛것을 접목하려는 병구는 화면 밖 엄태구를 떠올리게 한다.

엄태구는 '판소리 복서'에서 복싱과 판소리를 접목시키려는 퇴물 복서를 연기했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엄태구는 '판소리 복서'에서 복싱과 판소리를 접목시키려는 퇴물 복서를 연기했다. CGV아트하우스 제공


엄태구의 최신작 '낙원의 밤'. 과묵한 조직폭력배 박태구로 변신했다. 넷플릭스 제공

엄태구의 최신작 '낙원의 밤'. 과묵한 조직폭력배 박태구로 변신했다. 넷플릭스 제공

엄태구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새벽기도를 나가고, 성경을 읽으며 발음 연습을 한다. 촬영장에서는 성실한 배우로 소문나 있다. ‘판소리 복서’의 장혁기 감독은 “짧은 제작 준비 기간 동안 영화 속 복싱 장면을 철저하게 준비해 왔다”며 “저뿐만 아니라 무술감독님도 성실함에 놀랐던 기억이 있다”고 말했다. 장 감독은 “서로 말수가 적어 현장에서 사적인 대화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엄태구가 말이 많았던 적은 캐릭터를 탐구할 때다. 다시 장 감독의 말. “두 번째 미팅이 기억납니다. 당시 회사 사무실에서 만나 ‘판소리 복서’의 병구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는데, 시간이 길어져 사무실 사람들이 모두 퇴근하고 단 둘이 남을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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