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우리나라 대표 원로지성이자 지식인들의 사상가로 불리는 김우창 교수가 던지는 메시지. 우리 사회 각종 사건과 현상들에 대해 특유의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네이버의 후원으로 열리는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 강연 시리즈에 15일에는 이화여대 불문과 송기정 교수의 강연이 있었다. 강연의 제목은 "발자크의 '잃어버린 환상'과 19세기 프랑스의 백과사전 '인간극'"이었다. 3부작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1837년부터 1843년 사이에 완성된 것인데, 당대의 시대상을 여실히 반영한다. 이 무렵의 프랑스는 여러 차례의 혁명으로 민주적 정치체제가 들어섰다가 다시 왕정이 복구되던 혼란의 시대였다.
'잃어버린 환상', 그리고 발자크의 작품 총체 '인간희극'은 (강연자가 전하는 말로는 발자크 작품의 총체가 반드시 희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어의 '인간희극'을 한국에서는 '인간극'이라 번역한다고 한다) 과연 당대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백과사전'이라고 할 만하게 사회의 현실을 속속들이 보여준다. 송기정 교수가 요약한 바에 의하면, 당시의 프랑스는 출신 계급에 관계없이 완전히 출세주의자의 계략이 지배하는 사회였다. 사기하는 금융업자, 권력과 결탁하는 법관 그리고 자산 투기에 명을 건 여러 인간들 사이에서 진실하고 선한 사람은 설 자리가 없다. "교활하고 용렬한 인간은 성공하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는 고통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발자크의 삶도 시대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실적 묘사는 강한 비판의식을 드러낸다. 대체적으로 그가 동조하는 것은 자유주의라고 할 수 있지만, 한때 그는 스스로가 정통 왕당파임을 표방했다. 그 동기는, 송기정 교수가 소설 '사촌 베트'에서 인용하는 말로 설명될 수 있다. "종교의 부재와 동결된 이기주의에 지나지 않는 금전의 범람이 그 원인"이라고 등장인물 중 한 명이 말한다. "과거에는 그보다 우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귀족, 재능, 국가에 대한 헌신"이 그러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사라졌다.
발자크가 그리는 19세기 초반의 프랑스는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 사회의 혼란을 연상케 한다(우리 사회의 모습이 조금 더 낫다고 할는지도 모르지만). 보도에 드러나는 고위 공직 후보자, 공직자의 모습, 공공 정책에 스며들어가 있는 사익 추구. 이러한 것들은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어두운 동기들을 느끼게 한다. 드러나는 암울한 모습은 전환기의 사회가 겪어야 하는 불가피한 현실 모습인지도 모른다. 발자크 시대의 정신적·사회적 혼란은 전제적 정치 체제에서 자유주의 체제, 부르주아 자유주의 체제로의 이행과정에서 오는 혼란이라 할 수도 있고, 산업화로 인한 새로운 경제체제와 사회체제의 정착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가 거치게 된 대전환도 비슷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는 하나 상기할 것은 하나의 사회는 금전 위주의 이기주의, 개인적·집단적·국가적 이기주의를 초월함으로써만 참다운 인간적 사회, 문명사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사회의 중심에는 경제가 있다. 그러나 사회는 경제를 넘어 도덕적 질서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요인을 하나의 질서가 되게 하는 노력이 정치이다. 물론 정치지도자는 도덕을 넘어가는 전략가이다. 그러면서도 정치 지도자는 깊은 도덕적 품성을 지닌 사람이라야 한다. 바르지 않은 현실 속에서 지도자만이 그러한 품성을 가질 것을 기대하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순의 변증법 속에서 움직이면서 그것을 넘어가는 것이 역사의 진로라고 믿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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