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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한국일보>
함께 식사를 하는 행위는 관계를 돈독히 하는 가장 보편적 과정이 돼 왔다. 상대방에게 “식사 한번 합시다” 하면 좀 더 가까운 관계로 발전하고 싶다는 표현이고, 대개는 상대방도 흔쾌히 수락해 좋은 식사 자리가 마련되는 것이다. 국가 간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외교행사에서 전통적으로 만찬 등의 연회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져 온 이유이기도 하다. 국내 외교의전 지침에도 따로 복장부터 좌석 배치, 메뉴 등은 물론 대화법까지 세세한 안내가 있을 정도다.
▦ 현대 외교의전의 기본틀이 마련된 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전쟁 수습을 위해 1814년 9월부터 1815년 6월까지 유럽 주요국들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진행한 빈 회의 때로 알려진다. 당시 프랑스 외무상이었던 탈레랑은 루이18세 치하의 프랑스 궁정에 “내게 훌륭한 요리사들을 보내주시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하겠소!”라며, 이른바 프랑스식 ‘미식외교’를 주창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근년 들어서는 외교무대에서 연회의 중요성이 점점 퇴색해가는 느낌이다.
▦ 최근 미국을 실무방문한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를 위해 미국이 준비한 조 바이든 대통령과의 정상 오찬은 불과 20분짜리였고, 메뉴는 햄버거였다. 아무리 실무방문이라고는 하나, 전통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파격이고 결례일 수 있었다. 후에 보도된 데 따르면, 일본 외무성은 만찬을 성사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썼으나 무산됐다고 한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20분 햄버거 오찬에서 스가 총리의 모습이 불쌍했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 현 정부 들어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의 중국 방문 때도 비슷한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사드 문제 등으로 양국관계가 불편했다고 해도 명색이 국빈방문이었는데 우리 대통령의 ‘혼밥’ 논란이 빚어질 정도로 연회 스케줄은 빈약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스가 총리의 햄버거 오찬 때문에 이번 문 대통령의 방미 정상회담에서도 두 정상이 어떤 식사를 할지 관심을 모았으나, 결국 햄버거 비슷한 간편식의 일종인 크랩 케이크로 끝냈다. 상황에 따라 의전은 달라지는 것이지만, 왠지 외교도 점점 인스턴트화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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