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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성 '헤로인 100배'... 학교까지 파고든 '펜타닐 패치'

입력
2021.05.26 04:00
수정
2021.05.26 09:23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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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인 100배 중독성 펜타닐 처방 연간 35만건
의사들 마구잡이 처방에 '합법적 마약' 자리잡아
교내서 버젓이 흡입에 살인 등 강력 사건 비화도
식약처, 뒷북 가이드라인 준비하나 효과 미지수
"통제 불능 오기 전 심각성 인식하고 SNS 감시를"

펜타닐 성분이 포함된 듀로제식 패치. 한국일보 자료사진

펜타닐 성분이 포함된 듀로제식 패치.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7월 31일 오전 인천 중구 잠진도 선착장에서 남성 A(당시 22)씨의 시신이 담긴 여행 가방이 발견됐다. 수사망이 좁혀들자 자수한 피의자는 A씨의 동갑내기 친구 B씨였다. B씨는 경찰 조사에서 시신 발견 이틀 전인 지난해 7월 29일 A씨와 '약물'을 둘러싼 말다툼을 하다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털어놨다. 살인을 부추긴 약물은 마약성 진통제 '펜타닐'이었다.

A씨와 B씨는 2019년 말부터 경기 부천시와 서울 동대문구의 병·의원에서 '통증을 참기 힘들다'는 이유를 대면서 펜타닐 성분이 함유된 패치를 처방받아 흡입했다. 하지만 A씨가 지나치게 패치를 많이 처방받은 탓에 의사들이 A씨는 물론 B씨마저 의심하면서 펜타닐을 구하기 어렵게 됐고 친구 관계는 균열이 생겼다.

사건 당일 서울 마포구 오피스텔에서 펜타닐 패치 한 장을 나눠 흡입한 두 사람은 흥분한 상태에서 말다툼을 시작했다. B씨가 A씨를 비난하다가 그가 던진 가위에 발을 맞으면서 상황은 파국을 맞았다. 7시간에 걸쳐 B씨로부터 둔기와 발길질로 폭행당한 A씨가 이날 오후 11시 30분쯤 숨진 것이다. B씨는 훔친 여행용 가방으로 A씨 시신을 유기했다. 법원은 지난 2월 살인 및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위반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중독성이 헤로인의 100배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 펜타닐의 오용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암·디스크 환자 등을 위해 일반 병원에서도 처방해주는 의약품이라는 점을 악용, 허위 처방을 받아 마약으로 악용하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엔 경남·부산 지역에서 고등학생을 포함한 10대들이 펜타닐 투약으로 무더기 입건돼 경종을 울렸다. 전문가들은 수년 전부터 제기된 경고에도 당국이 세밀한 관리망을 만들지 못해 펜타닐이 학교에까지 침투하는 상황을 맞았다고 지적한다.

매년 처방 35만 건… 오용 규모 파악 안 돼

연령별 펜타닐 패치 처방 현황. 그래픽=김문중 기자

연령별 펜타닐 패치 처방 현황. 그래픽=김문중 기자

25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펜타닐 패치 처방 통계'에 따르면, 전국 병·의원에서 환자에게 패치를 처방한 건수는 2018년 36만4,950건, 2019년 35만4,922건, 지난해 34만9,688건에 달한다. 처방 건수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지만, 처방 1건당 여러 장의 패치가 제공되는 경우가 많고 패치 한 장을 최대 4등분해 마약용으로 판매하기도 해 오남용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펜타닐 패치가 마약 대용품으로 쓰이고 있다는 지적은 수년 전부터 있었다. 2019년에는 '교통사고로 온몸이 아프다'며 6년 여간 여러 병·의원을 돌며 패치를 처방받은 뒤 투약하거나 판매해 수억 원을 챙긴 미국 국적 남성이 검거됐다. 최근 경남경찰청은 부산·경남 지역 병·의원에서 펜타닐 패치를 처방받아 투약·유통한 10대 42명을 입건했는데, 이들은 공원과 상가 화장실, 심지어 교내에서 펜타닐을 투약했다.

펜타닐 패치가 오용되는 주된 이유는 병·의원에서 꼼꼼한 확인 절차 없이 처방을 내주기 때문이다. 의사가 펜타닐을 처방할 경우 '마약류 의료쇼핑 방지 정보망'을 확인해 환자의 최근 1년간 마약류 투약 이력을 조회하는 등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실제 이를 지키지 않는 이들이 많다는 게 현장의 이야기다. 환자가 '몇 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받아 고통이 심하다'는 등 허위 이유를 대도 과거 수술 기록이나 진단서를 요구하지 않고 신분증만 확인한 뒤 패치를 처방해주는 관행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부적절 처방 시 처벌 규정 마련해야"

펜타닐 패치를 가열해 흡입한 10대 4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이 흡입에 사용한 도구들. 경남경찰청 제공

펜타닐 패치를 가열해 흡입한 10대 42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사진은 이들이 흡입에 사용한 도구들. 경남경찰청 제공

식품의약품안전처 등 당국도 펜타닐 패치 관련 위험성을 인식하고 최근 처방 및 사용을 규제할 가이드라인 마련에 나섰지만, 문제의 심각성에 비해 대응 수위가 낮다는 지적이 나온다. 가이드라인에는 △18세 미만 환자에게 사용을 금하고 △마약성 진통제 투여 경험이 없는 환자에게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졌으나, 의료기관의 자율규제 성격이라 이행을 강제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가이드라인 제정에 참여하고 있는 식약처 마약류안전관리심의위원회 관계자는 "펜타닐 패치가 10대 손에 쥐어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인데도 논의가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진행되고 있다"며 "일부 의사가 사실상 '마약 딜러' 노릇을 하고 있는 현실을 타개하지 않는 한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처방 자체가 까다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감시 시스템을 만들고 여기에 처벌 조항을 적용해 감시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강선우 의원도 "청소년 대상 패치 처방에 대한 당국의 엄격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식약처와 경찰이 병·의원의 오용 방조 행위뿐 아니라 펜타닐 불법 거래가 이뤄지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수시로 단속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범진 아주대 약학대 교수(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연구소장)는 "펜타닐 패치 등 마약이 10대로까지 널리 번지는 것은 유통망이 SNS로 넓어졌기 때문"이라며 "비대면 거래망에 대한 적절한 모니터링 방안을 연구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오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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