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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한 산나물들을 맛보고 있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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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망초 순을 조금 땄다. 나물을 해서 아내에게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텃밭을 시작한 지 10년이라 보통 작물은 아내도 익숙하지만 산들에 피어나는 산나물은 아직 생소한 것들이 많다. 난 망초를 소금물에 살짝 데쳤다가 찬물에 씻은 다음, 다진 마늘, 소금 약간, 참기름 한 방울, 통깨 약간만으로 조물조물 무쳐 아침 밥상에 올려놓았다. 아내한테서 반강제로 부엌과 식탁을 빼앗은 지도 오래라 어지간한 요리는 이력이 붙었다. “이게 뭐예요? 시금치?” 망초 순이라고 대답하자 아내는 조금 집어 조심스레 오물거리더니 이내 맛있다며 듬쑥듬쑥 먹기 시작한다. 부드러우면서도 쌉쌀한 맛이 마음에 든다는 뜻이다.
몇 해 전 교외의 작은 아파트를 팔고 시골 아파트 전세로 옮기면서 남은 돈으로 경기도 가평에 맹지를 조금 구입했다. 매년 남의 땅을 빌려 텃밭놀이를 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농막 하나를 짓고 넓지 않은 밭을 일구며 지낸 것도 벌써 6년째다. 거리가 멀어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오가지만 도로도 사람도 없는 오지 산자락이라 한 주의 피로를 풀기엔 그만한 곳이 없다.
또 하나 좋은 점이 있다면, 예전에 몰랐던 산나물들의 이름과 맛을 조금씩 익혀가고 있다는 것이다. 깊은 산기슭이라 이곳엔 온갖 산나물이 지천으로 자라난다. 3월의 냉이, 쑥, 전호를 시작으로, 고들빼기, 민들레, 곰보배추, 둥굴레, 원추리, 화살나무 순, 다래 순, 두릅 순 등, 텃밭 작물은 5~6월이 되어야 수확이 가능하지만 자연은 그 전에라도 이렇게 귀한 먹거리를 넉넉하게 베풀어준다. 이럴 때, 냉이, 전호, 다래 순, 속속이풀 등을 데쳐서 냉동하거나 말려서 묵나물을 해두면 농사 시즌이 끝난 겨울 무렵 훌륭한 반찬거리가 되어준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에 정착한 지 20여 년, 서울에서 들려오는 뉴스들도 오래전에 무덤덤해졌다. 종부세가 어떻고 양도세가 어떻고 1가구 1주택이 어떻고…. 애초에 서울을 떠난 것도 경쟁에서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었다. 싸우다 만신창이가 되느니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여전히 무주택자 신세이지만 그래도 서울이라면 50억 원도 넘게 받을 만큼 넓은 땅이 있고 그 땅엔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식재료가 봄, 여름, 가을 자라난다. 아내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런 걸 “정신승리”라고 한다며 눈을 흘긴다.
토요일이면 우리 부부는 어김없이 차를 몰고 텃밭으로 향한다. 2주 전 심은 고구마줄기에 새싹이 돋고, 감자는 순 정리를 해야 할 정도로 잎이 무성하다. 나는 오전 노동을 대충 마무리 짓고 바구니를 챙겨 이곳저곳에서 나물 몇 가지를 채집한다. 웃자란 두릅 순은 연한 부분을 잘라 튀김가루를 무쳐 튀기고 산뽕나무 순은 나물을 한다. 왕고들빼기와 영어자도 따다가 상추와 함께 겉절이를 해 식탁에 내놓으니 이번엔 아내도 살짝 감동하는 눈치다. “와, 낭만식객이 다 됐네.” 아내의 농담에 나도 요리 실력은 뒤져도 낭만만큼은 그 양반 못지않다며 너스레도 떨어본다.
그러고 보니 꽤나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든다. 서울사람들은 없어서 못 누리고, 몰라서 못 먹는다는 귀한 여유와 봄나물이 아닌가. 이 정도 사치라면 아무리 패배자의 정신승리라 해도 한 번쯤 살아봄직하다 싶다. 모내기를 위해 물 댄 논 위로 왜가리 두 마리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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