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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회사 퇴직금으로 지켜낸 할머니의 100년 우탕 '밥장사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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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국밥 장사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경기 안성시청 인근에 위치한 안일옥. ‘100년 우(牛)탕’으로 더 유명한 이 가게 김종열(61) 대표는 20여 년 전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서울의 제약회사에서 13년간 근속하면서 영업관리본부장까지 오른 그가 고향 안성으로 내려온 이유는 어머니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작은형의 빚보증 때문이었다. 어머니와 가족들이 고생해서 매입한 3층짜리 건물이 경매에 부쳐지고 3대를 이어온 우탕의 명가 안일옥이라는 이름까지 내놓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김 대표는 “1997년 3월 31일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안성에) 내려왔다”며 “날짜까지 기억할 만큼 당시 기억이 또렷하다”고 말했다.
모아둔 돈과 퇴직금, 서울 아파트를 매각해 내려온 뒤 비록 3층 건물은 찾지 못했지만 식당과 ‘안일옥’ 간판은 지켜냈다. 이후 작은형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식당에서 손을 떼면서 김 대표가 안일옥 대표가 됐다. 그해 8월 15일 광복절에 김 대표 가족 모두가 안성으로 내려왔다. 그는 “서울 생활에서 해방된 날이라 몸과 마음 모두 편했다”며 “할머니, 어머니의 대를 이을 것이라고 상상도 못했지만 이제 안일옥은 내 인생이자 자랑이 됐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안일옥의 3대 주인장이다. 현재는 부인 우미경(59)씨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1대 주인장은 고 이승례씨, 김 대표의 할머니다. 이씨는 1920년 40대 초반이던 남편이 병석에 눕게 되자 아이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장날 안성장터에 가마솥 하나 걸어놓고 국밥을 팔았다. 가게랄 것도 없는, 말 그대로 난전이다.
장터 가까운 우시장에서 나오는 뼈, 내장 등을 이용해 국밥을 만들어 팔았다. 국밥이라고 해서 고기가 듬뿍 들어 있는 것도, 요리법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다. 장날마다 얻을 수 있는 재료가 일정하지 않아 ‘우탕’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소 부위별로 구입이 가능해 설렁탕·도가니탕·갈비탕·곰탕·소머리국밥 등 세분화된 요리를 즐길 수 있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는 게 김 대표의 설명이다.
장날이 아닐 때 이씨는 도축장에서 나온 부산물이나 장날에 팔다 남은 국밥을 대야에 담아 가가호호 방문하며 팔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잘 닦이지도 않은 길을 하루 4㎞ 이상 걸어다니며 자식들을 키웠다고 한다.
김 대표의 어머니인 이양귀비 여사가 안일옥 2대 주인장이 된 것은 열아홉 살이던 1937년이다. 남편의 이름도 얼굴도 모른 채 혼인한 이씨는 시집온 첫날부터 시어머니를 도와 국밥을 팔았다. 이씨 친정도 당시 안성장터에서 ‘느티나무’라는 국밥집을 운영하는 집안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어머니는 할머니를 도와 국밥을 팔았고, 아버지와 삼촌들은 땔감을 패고 나르고 가마솥 설치 및 철수를 담당했다”며 “어머니는 시집와 평생을 국밥 장사를 했는데 내가 대를 이은 것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이씨가 시어머니에게 주도권을 넘겨받은 건 6·25 전쟁 직전이다. 그렇다고 우탕의 맛이 바뀐 건 아니었다. 시어머니의 노하우를 그대로 이어받은 덕이다. 이씨도 ‘고기는 찢어 넣어야 맛이 있다’며 매일 손수 고기를 찢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전쟁이 발발하자 우탕은 더욱 잘 팔렸다. 피란길에 오른 이들이 들러 국밥을 먹고 가면서 돈을 벌게 되자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52년 식당 건물을 매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번화가인 사거리 찻길 가(지금의 창전동)였다. 가게 앞으로 버스가 다니고 주변에 관공서와 소방서, 경찰서, 군청 등이 모여 있었다.
안일옥이라는 이름은 즉흥적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김 대표의 아버지가 전쟁이 끝난 후 영업 허가를 신청하려 했는데 읍사무소 직원이 “상호 없이 어떻게 장사하느냐”면서 지어준 이름이라고 했다. '안(安)성에서 제일(一) 가는 편안한 가게(屋)'라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안성의 이름 없는 우탕집이 ‘안일옥‘이 되는 순간이었다.
안일옥은 지난해 창업 100년을 맞았다. 1920년 난전에서 시작한 우탕집이 '100년 식당'이 된 것이다. 대를 이어온 맛의 비결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 대표의 대답은 0.1초도 걸리지 않았다. “밥장사 정신이죠.”
‘밥장사 정신’은 김 대표의 할머니와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한 말이자 몸소 실천한 일이다. 김 대표는 “할머니께서는 ‘식당은 배고픈 사람들이 들어오는 곳이다. 배를 채우러 들어오는 사람들이니까 무조건 배불리 먹고 나가게 해줘라’라고 하셨다”며 “어머니는 ‘좋은 재료는 꼭 현금으로 사라. 그리고 냉장고를 재료로 꽉꽉 채워 놓아야 손이 커진다’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손님이 청하지 않아도 밥과 고기, 국물을 더 가져다 줬다. 밥만 들고 온 이들에게는 고기와 국물을 원하는 만큼 제공했으며, 돈이 없는데 국물만이라도 달라고 하면 국물뿐 아니라 밥과 고기까지 두 그릇씩 대접했다고 한다. '인심 한번 후하다'는 입소문은 안일옥 명성에 분명 보탬이 됐을 터이다.
김 대표 역시 재료를 아끼지 않는다. 설렁탕 한 그릇에 굵고 큰 고기가 10점 이상 들어간다. 반찬으로 제공하는 배추김치는 겉절이로 매일 오전 오후 두 번 담근다. 깍두기는 주 1회 담가 일주일 숙성 후 내놓는다. 김 대표는 “우리집은 보물처럼 내려오는 '황금 레시피'가 없다”며 “그렇기 때문에 할머니, 어머니 시절의 맛을 느낄 수 없겠지만 양만큼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비결이 없는 것이 비결"이라고 김 대표는 겸양해하지만, 안일옥 우탕은 고소하고 담백하며 비린내 없이 소뼈와 고기 본연의 풍미를 살린 맛으로 정평 나 있다.
안일옥의 가마솥 3개는 가마당 200명분으로 24시간 풀가동된다. 한 솥은 사골과 잡뼈, 양지, 소머리 등 우탕의 기본이 되는 국물을 내고, 다른 솥은 양념이 첨가된 장터국밥용 국물을 낸다. 나머지 솥은 갈비, 도가니 등 고기만 삶은 갈비탕을 내고 있다. 중간중간 기름을 제거하며 12시간 우려낸 후 솥을 비우고 다시 새 재료를 넣는 일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조미료 등 인공 첨가물은 일절 들어가지 않는다.
200년 식당이 되기 위한 준비작업도 한창이다. 김 대표의 아들 형우(31)씨가 대를 이을 채비를 하고 있다. 2007년부터 안일옥에서 일하고 있는 형우씨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요리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더니 조리과학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대학에서도 요리 관련 학과를 전공했다. 취사병으로 자원입대해 병역을 마친 뒤엔 대학 은사의 추천으로 튀니지 관제 요리사로 3년간 근무했다. 김 대표는 “아들이 초등학생 시절 자기 장래희망을 얘기할 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정말 그 길을 갔다”며 “4대 주인장은 바로 우리 아들이 될 것”이라고 했다.
현재 안일옥 내 형우씨 일터는 주방이 아닌 주차장 옆 컨테이너박스다. 온라인 주문을 받아 전국에 택배로 보내주는 일인데, 최근 인기 있는 '먹방'(먹는 것을 소재로 한 방송)에 소개되면서 주문이 폭주했다고 한다.
김 대표는 아들이 사회 경력을 더 쌓고 나면 가업을 맡길 예정이다. 그는 "앞으로 10년은 최선을 다해 아들에게 직업정신을 보여주려고 한다"며 "내가 선대에게 어깨너머로 배웠듯 아들도 나를 통해 스스로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김 대표가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건 역시 '밥장사 정신'이다. "안일옥이 200년, 300년 역사를 이어갈 수 있을지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정신을 얼마나 소중히 지켜나가느냐에 달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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