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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억5,600만뷰' 런닝맨의 나라… 한국은 왜 저작권 스승 자처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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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일간지 최초로 2017년 베트남 상주 특파원을 파견한 <한국일보> 가 2020년 2월 부임한 2기 특파원을 통해 두 번째 인사(짜오)를 건넵니다. 베트남 사회 전반을 폭넓게 소개한 3년의 성과를 바탕으로 급변하는 베트남의 오늘을 격주 목요일마다 전달합니다. 한국일보>
베트남 현지 방송 채널은 지역별 편차를 고려해도 200개는 가뿐히 넘는다. 복수의 국영방송이 많게는 10여 개의 채널을 각각 보유하고 있으며 60여 개 지방성(省)이 만든 방송도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여간 해선 금방 돌린 채널이 뭔지도 기억 못 하는 게 흔하다. 그나마 남는 건 중복되는 기업 광고와 출연 모델 정도. 한국처럼 베트남도 방송광고가 현지 인기를 가늠할 대표적 척도인 이유다.
한동안 K팝 아이돌 그룹이 독차지했던 방송광고 시장은 지난해 하반기 지각 변동이 일어났다. 현지 가수 겸 배우인 쩐탄, 닌즈엉란응옥, 응오끼엔후이가 한국 전자제품부터 글로벌 음료, 자국 대기업 메인 광고까지 석권한 것이다. 반가운 것은 이들 모두 지난해 4~7월 현지 HTV7에서 방영된 베트남판 '런닝맨(짜이디쪼찌ㆍChay Di Cho Chi)' 고정멤버 출신이라는 점이다. 같은 해 초만 해도 평범한 연예인이었던 이들은 런닝맨의 브랜드 파워로 전국구 자리에 올랐다.
고작 예능 한 프로 출연이라고 얕잡아 볼 게 아니다. 런닝맨이 베트남에 남긴 기록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방영 당시 조회수 110만에서 시작한 런닝맨 1화는 19일 현재 1,800만을 넘겼다. 가장 인기 많은 9화는 무려 3,100만, 15개 에피소드 평균 조회수도 1,700만에 달한다. 시리즈 누적 총 조회수는 자그마치 2억5,600만이다. 베트남 인구는 지난해 기준 9,600여만 명이다. 단순 계산하면 1년 새 국민 전체가 런닝맨을 세 번가량 반복 시청했다는 뜻이다.
한국 입장에선 런닝맨의 성공이 기분 좋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중국에 이어 'K포맷'의 글로벌 경쟁력이 재차 확인됐으니 더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모색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베트남 대중문화업계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 단순한 시샘이 아니다. 이들에게 런닝맨 신화가 역설적이게도 자국의 빈약한 저작권 인식과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인 탓이다.
실제로 방영 전 현지 방송가에선 런닝맨의 대성공을 예측하는 이가 많지 않았다. 기존 한국 예능 대부분이 이미 현지 불법 스트리밍ㆍ다운로드 사이트를 통해 장시간 노출된 터라 '한·베트남 공동 제작' 정도로는 큰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할 것이라 봤다. 베트남 제작사가 판권을 사들여 자체 리메이크한 한국 드라마 '거침없이 하이킥', '태양의 후예' 등이 형편없는 연출로 악평만 받은 것도 기대치를 낮췄다.
공동 제작사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 본방송 직후 현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수많은 호평 등을 근거로 음지에 숨어 있는 적극 시청층은 충분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관건은 유료로 콘텐츠를 구매하지 않는 베트남인들의 시청 습관을 어떻게 바꾸냐는 것. 이에 제작진들은 방송 송출과 동시에 에피소드 전체를 유튜브에 무료 공개하는 역발상을 택했다. 양질의 방송을 양지로 확실히 올려 광고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이었다. 저작권 보호 수준이 낮은 베트남은 자국 제작 영상물의 경우 유튜브 전체 공개가 아직 가능하다.
효과는 명확했다. 폭발적인 조회수에 놀란 베트남 대기업들은 거액의 광고비를 투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시즌2 제작에 직접 참여하려는 업체들도 줄을 섰다. 몇몇 에피소드에 간접광고(PPL)로 등장한 48개 한국 기업 제품들의 현지 인지도 역시 급상승했다. "어차피 다 공짜로 볼 텐데 크게 공들일 필요가 뭐 있냐"던 베트남 콘텐츠 생산자들은 음지의 거대한 영향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열악한 투자와 부족한 저작권료 선순환 현실을 불평만 할 게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변화를 선택해야 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베트남은 결국 변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동안 양적 경제 성장에만 집중한 그들 앞에는 같은 기간 방치된 수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었다. 우선 국민들이 왜 저작권이 중요하고 저작물을 돈 주고 구매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요성을 공감하지 못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 베트남사무소(KCCㆍ소장 박인기)가 지난 1~4월 하노이 탕롱대 등 4개 대학 한국어과 학생 370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베트남 대학생의 53%가 "저작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으며, 34%는 "대충 알고 있다"고 응답했다. 그나마 SNS에 가장 익숙한 이들마저 저작권 문제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 법제와 저작권 보호 시스템도 형편없다. 별도의 저작권 관련 법령은 입법조차 안 됐으며 지적재산권법 하부 조항으로 있는 관련 조문은 53개항에 불과하다. 정책 부서는 독립 기구가 아닌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저작권국 하나뿐이다. 저작물 창작자와 사용자 사이에서 권리와 이익을 조율해야 할 저작물 집중관리단체(CMO) 역시 유명무실한 건 마찬가지. 2000년대 초 한국의 '소리바다' 사태가 불러온 저작권 대란 당시처럼 베트남은 여전히 창작자가 일일이 사용자와 저작물 사용 계약을 맺고 있다.
생태계 자체가 조성되지 않다 보니 불법 저작물 대응은 가장 1차원적인 '경고와 삭제'에만 의존하는 모습이다. 한국 등 주요 저작권 침해 피해국은 불법 인터넷사이트를 통한 피해가 중첩되면 현지 법무법인을 통해 사이트 운영진에 자체적으로 경고장을 발송한다. 물론 이들은 처벌 근거가 없는 경고에 꿈쩍도 하지 않는다. 참다 못한 피해국이 특정 인터넷 웹페이지 주소(URL) 차단을 공식 요청해야 베트남 정보통신부 산하 방송전자정보국이 삭제에 나선다. 물론 대처가 늦다 보니 실효성은 당연히 낮다. 한국이 2018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 동안 12만8,003건의 불법 저작물에 대한 강경 대처를 요구했으나 실제 삭제된 건은 절반인 6만9,581건에 그쳤다.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 이어지자 한국이 먼저 팔을 걷어붙였다. 베트남 저작권 생태계 구축은 양국 모두에 '윈윈'이 될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입장에선 단기적으로 베트남 저작권 체계가 빨리 잡히면 우리 저작물의 현지 보호가 한결 쉬워진다. 더불어 한국식 저작권 시스템만 잘 이식된다면 제2의 런닝맨 신화를 쓸 유리한 여건도 자연스럽게 조성된다. 베트남 역시 남는 장사다. 현재 베트남은 미국 정부가 지정한 저작권 감시대상국으로, 각종 제도 개선을 요구받고 있는 처지다. 한국의 도움으로 체계가 완성되면 무형의 통상 압력에서 손쉽게 벗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한국의 베트남 저작권 살리기는 다방면에서 진행 중이다. 시작은 대국민 인식 개선을 위한 교육과 홍보활동이다. 이와 관련 KCC 하노이 사무소는 올 초 북부와 남부 4개 현지 대학에서 저작권 강의를 진행했으며, 하반기에도 중부 소재 대학을 포함한 5개 대학을 방문할 계획이다. 동시에 주베트남 한국문화원과 함께 저작권 홍보 캠페인도 준비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와 입법부에 한국의 저작권 관리 체계와 법령을 전수하는 작업도 이어지고 있다. 지금처럼 관망하는 것이 아니라 저작권을 사전에 보호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목표다. 창작자와의 협업과 인식 개선에도 나선다. KCC 하노이사무소는 금명간 베트남가수협회(APPA) 소속 창작자들을 모아 저작권 교육을 진행할 예정이다.
박인기 KCC 소장은 "베트남 내 저작권 보호 시스템이 구축되면 국적과 상관없이 창작자의 생산활동이 안정되고 한국의 문화산업 국익 역시 증대되는 선순환 구조가 완성된다"며 "과거 한국의 저작권 문제에 강하게 개입하던 미국의 모습이 아니라 일상을 공유하며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동료로 남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런닝맨의 나라 베트남, 그들과 한국의 또 다른 달리기는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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