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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知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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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사랑만큼 우정에도 목말라 했던 거 같다. 사랑은 이뤘다. 그런데 진실한 우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친교는 허다했다. 지인도 많았다. 그런데 나의 지기(知己)는 과연 얼마나 됐을까.
이 나이에 갑자기 우정을 운운함은 아마 내가 외로워져서일 게다. 평생의 밥벌이에서 물러난 남자는 더 그런 편이다. 자꾸 혼자라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가족은 사랑하지만 가족일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수평적인 평등한 관계가 아니다. 사랑이란 말보다 우정이란 단어가 좋아지면 나이를 먹은 증거라는데 내가 그런가 보다.
사랑과 우정의 차이에 대해서는 많은 비유가 있다.
사랑은 눈물짓게 하고 우정은 웃음 짓게 한다, 사랑은 주는 거지만 우정은 주고받는 것이다, 사랑은 눈에서 우정은 귀에서 시작한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히지만 우정은 아니다, 세월은 우정을 강하게 하지만 사랑은 약하게 만든다, 우정은 내 곁에 두고 싶은 거지만 사랑은 그 사람 곁에 있고 싶은 것, 사랑이 꽃이면 우정은 뿌리…
니체는 사랑보다 우정을 상위 개념으로 봤다. ‘사랑은 눈이 머는 것, 우정은 눈을 감는 것’이라고 했다. 심지어 ‘결혼이 불행해지는 이유는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정이 부족해서’라고 했다.
결국 사랑의 속성은 소유, 집착, 배타성, 가변성, 비극성이다. 우정은 공유, 공존, 관용, 이해, 영원성이다. 정호승 시인은 사랑에 대해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시,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몽테뉴는 우정에 대해 “진정한 우정이란 영혼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에 거문고의 명수 백아(伯牙)가 있었다. 그의 오묘한 경지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나무꾼 종자기(鍾子期)를 만나게 됐다. 백아가 거문고를 켜면 종자기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백아의 마음속 생각을 다 알아맞혔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그의 무덤 앞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고는 거문고 줄을 끊었다. ‘백아절현(伯牙絶絃)’의 고사다.
말하지 않아도 나의 음(音), 즉 속마음을 알아주는 오직 한 사람, ‘지음(知音)’이란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 지인은 많아도 지음은 만나기 어렵다. 내가 행여 술집을 차리는 일이 생기면 이 말을 간판으로 삼으려는 생각도 했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종자기’를 찾아 평생 두리번거리고 마음을 주었다 되돌렸다 했다. 평생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았다. 그런 나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동조하고 받아준 지음이 과연 있었던가, 아니 나는 그 누구의 지음이 되어주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던가.
우정을 가리키는 고사성어는 유독 많다. 수어지교(水魚之交)니, 금란지계(金蘭之契)니, 문경지교(刎頸之交)니, 죽마고우(竹馬故友)니 하는 말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로는 무언가 부족해서 ‘간담상조(肝膽相照)’란 말을 좋아한다.
이 말도 중국 고사에서 나왔다. 간과 쓸개를 서로 꺼내 내보일 수 있는 ‘막역지우(莫逆之友)’를 말한다. 여기엔 비밀도 험담도 눈치도 없다. 그냥 인간 대 인간이다. 그의 면상이 내 면상이요, 그의 주름살이 내 주름살이요, 그의 얼룩이 내 얼룩이다. 나이 먹어가니 서로의 오욕칠정(五慾七情)을 털어내며 인생살이 공범이 되어줄 지음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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