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고을의 대학자는 왜 자신을 '일개 좀벌레'라 했을까

입력
2021.05.19 04:30
<110> 함양 안의면 화림동 계곡과 개평한옥마을

함양 안의면 화림동 계곡의 농월정. 계곡 귀퉁이에 세운 정자 앞으로 넓은 암반이 펼쳐지고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의 맑은 물이 물골을 형성하며 흐르고 있다.

함양에 안의라는 곳이 있다. 전북 장수와 가깝고, 경남 거창과 이웃한 면 단위 지명이다. “거기 사람들 자존심이 대단하지요. 어디서 왔냐고 물으면 절대 함양이라 하지 않고 안의에서 왔다고 합니다.” 함양군 문화관광 해설사의 말이다. 함양이 어디인지도 잘 모르는 외지인에게 당당하게 ‘안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은 지역에 역사적 유적이 풍부하고 수려한 자연 경관이 뒷받침하기 때문이다.


팔담팔정 수려한 계곡, 그중에서도 화림동천

대전통영고속도로 서상IC에서 나와 안의면 소재지로 연결되는 28번 국도는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강을 따라 내려간다. 약 20㎞에 불과한 이 구간에 함양에서 자랑하는 정자가 몰려 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여덟 개의 아름다운 물 웅덩이가 있고, 그만큼의 정자를 세웠다 해서 ‘팔담팔정(八潭八亭)’의 고장으로 부른다. 계절마다 온갖 꽃이 만발하고 수목이 우거지니 ‘화림동’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여덟이라는 숫자는 어디라고 특정하기 힘들 정로도 두루 경관이 빼어나다는 수사로 해석하는 게 맞을 듯하다. 함양에서는 팔담팔정보다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는 표현을 더 강조한다. 안의현의 경치 좋은 3개 골짜기를 일컫는 말이다. 동천(洞天)은 도교적 이상향이다. 세상사 시름 잊고 유유자적하는 곳, 마음에 평화를 주는 안식처다. 삼동의 첫 번째는 이곳 화림동이요, 두 번째는 기백산 자락의 심진동, 마지막은 거창의 명승 수승대가 있는 원학동이다.

안의현은 조선 후기까지 함양 북동(안의·서상·서하면)과 거창 서북(북상·위천·마리면) 일대를 포괄하는 독립된 행정 단위였다. 그러나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해체돼 함양과 거창으로 분리된다. 이인좌와 함께 반란을 주도한 정희량의 고향이 바로 안의였기 때문이다. 역적의 고향 안의의 유생들은 이때부터 벼슬길이 막히고, 자연을 벗 삼아 공부밖에 할 일이 없었으니, 경치 좋은 계곡마다 정자가 들어섰다는 게 안의삼동에 대한 해석이다.

함양 화림동 계곡 거연정. 조선 중기의 학자 전시서가 처음 지은 정자로, 주변 경관이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평가받는다.


함양 화림동 계곡의 거연정. 거친 바위 사이로 옥빛 계곡물이 잔잔히 흐르고 있다.


함양 화림동 계곡의 군자정. 함양 출신 대유학자 일두 정여창의 방문을 기념해 세웠지만 바로 위의 거연정에 비하면 운치가 떨어진다.

화림동 계곡을 내려가며 처음 만나는 정자는 거연정이다. 정선 전씨 입향조이자 조선 중기의 학자인 전시서가 은거하며 억새로 만든 정자를 후손들이 재건했다. 거연(居然)은 주자의 시에 등장하는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땄다. 물과 돌이 어우러진 자연 속에서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계곡 중간의 바위에 올라앉은 정자의 모양새가 꼭 그대로다. 소나무가 감싼 정자를 사이에 두고 맑은 물이 흐르는데, 한쪽은 거친 바위에 갇혀 작은 연못을 이루었다. 정자로 연결한 둥그런 다리가 수면에 비쳐 잔잔한 운치를 더한다. 조선 후기의 문신 임헌회는 ‘거연정 기문’에서 “영남의 명승 중에서 안의삼동이 가장 빼어나고, 그중에서도 화림동이 최고이며, 화림동에서도 거연정이 단연 으뜸”이라고 평했다.

거연정 바로 아래에는 군자정이 있다. 전시서의 후손들이 지역 출신의 대학자 정여창이 머무르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지었다. 강 자락의 봉전마을은 그의 처가가 있던 곳이다. 역시 암반 위에 세웠지만 운치는 거연정만 못하다.

동호정 건물은 화림동 계곡에서 가장 오래됐고, 건립 당시의 골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동호정 앞에는 넓은 암반이 있고, 계곡에는 맑고 푸른 물이 산자락을 감싸며 흐르고 있다.

군자정에서 약 1.4㎞를 내려가면 동호정이 있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895년 건립한 정자다. 1936년 중수를 거쳤지만 기본 골격은 그대로여서 화림동 정자 중 가장 오래됐고 규모도 가장 크다. 바로 앞에 널찍한 암반이 있고 옥색 물빛이 산자락을 휘감고 있어 잠시 쉬어가기에 그만이다. 너른 암반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 악기를 연주하는 곳, 술을 마시며 즐기던 곳이 따로 있었다니 풍류의 멋이 깃든 곳이다.

여기서 다시 3㎞를 내려가면 농월정(弄月亭)이 있다. 예조참판으로 재임 중이던 이 고장 출신 박명부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강화를 반대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시회를 열고 세월을 낚았다는 곳이다. 정자는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 1899년 지었다는 정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지금은 깔끔하게 새 건물이 세워져 있다.

달빛을 희롱하는 정자라니, 허세가 지나친 게 아닌가 싶은데 바로 앞으로 펼쳐지는 풍광을 보면 수긍을 하고도 남는다. 닳고닳아 반질반질한 너럭바위는 수백 명이 너끈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백옥처럼 새하얀 바위 위로 맑은 계곡물이 여러 갈래의 골을 형성하며 미끄러지고 떨어진다. 은은한 달빛이 암반과 여울에 가득 들어찬 가운데, 청아한 물소리 들으며 술 한 잔에 시 한 수 띄워 보내던 옛 사람들의 풍류가 어땠을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화림동 계곡 농월정 앞에는 드넓은 암반이 펼쳐져 있다. 달빛이 들어찬 계곡에서 술상을 앞에 두고 시를 읊던 옛 사람들의 풍류가 그려진다.


함양 화림동 계곡의 농월정. 넓게 펼쳐진 백색 암반 사이로 푸른 계곡물이 골을 이루며 흐르고 있다.


화림동 계곡 농월정에서 본 계곡 풍경. 백옥 같은 암반에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산자락에는 푸르름이 더해간다.


농월정 주변은 국민관광지로 개발돼 있다. 정자는 계곡 건너편에 있다. 도보 다리를 건너 오솔길을 통과해야 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면 상가 건물에 가려 계곡이 보이지 않는다. 이정표도 충실하지 않아 다리를 찾는 데 헤매기 일쑤다. 화림동 계곡은 도로와 나란히 이어지기 때문에 접근성이 뛰어나다는 것이 최대 장점이다. 정자마다 주차장이 있어서 차를 대기도 어렵지 않다. 거연정에서 농월정까지는 걷기길이 조성돼 있다. 이름하여 ‘함양 선비 문화탐방로’다. 계곡을 따라 걷는 그늘진 숲길이다.

“한 마리 좀벌레” 일두의 정신 어린 개평마을과 남계서원

안의면 소재지는 시골 면 단위 치고 제법 짜임새가 있다. 면 사무소 인근에 법인사라는 작은 절이 있다. 보기 드물게 마을 중심지에 터를 잡은 평지 사찰이다. 해인사의 말사지만 보물로 지정된 불상(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탱화(감로왕도)를 보유하고 있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도 2점이나 있다. 맞은편에는 세련된 복고 감성의 카페 ‘파란지붕’이 있다. 85년 된 살림집을 개조한 건물로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상호로 쓰고 있다.

안의면 한가운데 자리한 법인사. 해인사의 말사지만 4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안의면 중심의 파란지붕 카페. 85년 된 집을 개조한 실내는 복고 감성이 물씬 풍긴다.


안의면 소재지 남강변의 광풍루. 한때 함양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다는 자부심의 상징물이다.


안의면 소재지 남강변에 버드나무 거목이 물그림자를 드리우며 운치 있게 늘어서 있다.

강변으로 나가면 제법 규모가 큰 2층 누각이 남강을 바라보고 있다. 조선 태종 12년(1412) 당시 안의현감인 전우가 선화루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웠고, 세종 때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성종 25년(1494)에는 역시 안의현감을 지낸 정여창이 중건하고 지금의 명칭인 광풍루(光風樓)로 이름을 바꿨다. 맞은편 고수부지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줄지어 늘어서 있고, 풍성한 나뭇가지가 잔잔하고 푸른 수면에 비친다. 그 뒤로 기백산(1,331m) 줄기가 우람한 산세를 뽐내고 있는데, 바로 아래가 안의삼동의 하나인 심진동(尋眞洞) 계곡이다. ‘아름다움에서 진리 삼매경에 빠지는 곳'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계곡 입구의 심원정은 조선 중기 거제현감을 지낸 유학자 정지영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었다. 수수하고 고풍스런 정자 앞 계곡에 깊고 푸른 물이 담겨 있다. 계곡을 거슬러 포장도로가 끝나는 곳에 다다르면 사찰 없는 일주문이 외롭게 솟아있다. 신라시대에 창건했다는 장수사의 흔적이다. 한국전쟁으로 절간은 소실되고 없지만 홀로 남은 산문이 묘한 매력을 뽐내고 있다.

심진동 계곡 상류의 장수사 일주문. 절간은 사라지고 산문만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심진동 계곡 용추폭포. 소가 넓고 깊어 주변에만 가도 무더위가 씻긴다.


심진동 계곡 상류의 용추폭포.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았지만 수량이 풍부하고 물소리가 우렁차다.


심진동 계곡 초입의 물레방아 공원. 안의면은 현감으로 재직한 연암 박지원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한 곳으로 추정된다.


바로 옆 계곡으로 들어서면 물소리가 우렁차다. 용이 몸부림치듯 힘차게 떨어지는 용추폭포다. 높이에 비해 수량이 풍부하고 물줄기가 웅장해 폭포 아래에 넓고 깊은 소가 형성돼 있다. 옥빛이 넘실대는 물가에 서면 한여름 무더위도 말끔히 씻길 듯하다.

다시 안의로 내려오다 보면 도로 우측에 물레방아 공원이 있다. 1792년부터 5년간 안의현감을 지낸 연암 박지원의 동상과 물레방앗간을 재현해 놓았다. 중국을 방문해 신문물을 접하고 돌아온 박지원이 국내에 처음으로 물레방아를 설치한 곳이 바로 이 고을이라는 것을 알리는 시설이다.

안의현감으로 유명한 인물 중에 조선 성종 때의 문신이자 성리학의 대가인 일두 정여창(1450~1504)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호인 ‘일두(一?)’는 ‘한 마리 좀벌레’라는 뜻이다. 중국 송나라 유학자 정이천이 자신을 되돌아보는 글에 쓴 ‘천지간일두(天地間一?)’에서 따온 이름이다. 정이천은 글에서 ‘책을 좀 읽었다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다른 사람을 위해 한 일이 없다’고 했다.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부, 세상에 이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노동자, 나라를 지키는 군인에 비하면 자신의 삶은 한 마리 좀벌레에 불과하다는 통렬한 반성이다. 일두라는 호에서 겸손과 각성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는 대학자의 마음가짐이 읽힌다.

일두 정여창의 고향인 개평마을. 거목이 자라고 있는 일두고택을 중심으로 한옥마을이 형성돼 있다.


개평한옥마을 일두고택 담장길. 마을 전체에 아늑한 돌담 골목이 형성돼 있다.


일두고택이 있는 개평마을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남계서원이 있다. 성리학의 대가 일두의 학덕을 기리는 시설이다.

그의 고향은 안의면 인근 개평마을이다. 옛집인 일두고택을 중심으로 일대가 한옥마을이다. 고택은 그가 타계한 지 약 100년 후 후손들이 중건했다. 1만 m²(약 3,000평)의 대지에 12동의 건물을 갖춘 남부지방의 대표적 양반 고택인데,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일시적으로 문을 닫았다. 대신 돌담이 깔끔하게 정비된 마을 안길을 걷는 운치가 그만이다. 서편 언덕에 오르면 아름드리 전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는 일두고택을 비롯해 한옥마을 전경이 아늑하게 펼쳐진다.

인근에 지방 유림이 정여창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건한 남계서원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한국의 서원’으로 등재된 9개 서원 중 하나다. 영주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으로, 한없이 낮은 자세로 살고자 한 대학자의 정신이 깃든 곳이다.

함양=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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