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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자윌링'의 담장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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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의 불화로 '30년전쟁'이라는 살육의 전쟁을 경험한 유럽은, 적어도 자신들의 주류 종교에 관한 한 관용과 불간섭의 뼈저린 교훈을 얻었다. 하지만 서로 섞이지 않으려는 경향은 일부 국가에 뿌리 깊게 남아, 6~17세기 독립전쟁에까지 갈등의 뿌리가 뻗어있는 네덜란드에는 '페르자윌링(Verzuiling, 영어로는 Pillarization)'이란 용어까지 있다. 흔히 '기둥화'라고 번역되는 페르자윌링은, 두 교인 집단이 정치, 교육, 스포츠, 취미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독자적인 수직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양립하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한자동맹의 무역국가 전통의 네덜란드는 북유럽 개혁파에게 비교적 우호적이어서, 신성로마제국의 가톨릭 황제 카를5세 치하에서 곤란을 겪었고, 독립전쟁 때도 스페인 가톨릭 군대의 침략에 맞서야 했다. 그런 역사적 앙금 탓인지 두 집단의 불화는 유난스러웠고, 2차대전 직후에는 고질적 '분리-차별'의 병리를 극복하자는 사회운동이 일기도 했다.
그런 네덜란드에서 1842년 22세 가톨릭신자 판 아페르던(van Aefferden)이 개신교도인 33세 기병대 장교 판 호르큄(van Gorkum)과 결혼한 건 엄청난 스캔들이었다. 하지만 부부는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만 38년을 해로하고, 1880년 남편이 먼저 숨졌다. 호르큄은 물론 개신교인 묘지에 묻었다. 8년 뒤인 1888년 아페르던도 세상을 떴다. 그의 유언은 남편 무덤에 최대한 가까이 묻어달라는 거였다. 유족은 그 애틋한 유언을 받들어 남편 묘지와 담장을 사이에 둔 가톨릭 교인 묘지에 그를 묻고, 이듬해 5월 21일 비석을 세웠다. 한껏 까치발로 선 부부의 두 비석이 담장을 넘어 손을 맞잡은 형상. 둘 중 누구도 생전에 개종하지 않은 까닭은 알려지지 않았다.
페르자윌링에 항변하듯 선 비석은, 양립한 두 기둥을 넘어 100년 넘게 지금도 하나로 손을 맞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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