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짓밟는 군부통치의 말로

입력
2021.05.16 10:52
구독

5월에 떠오르는 아르헨티나 영화 '오피셜 스토리'

편집자주

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싶어요. 어떻게 그렇게 편히 잘 살 수 있었는지."

영화 '아들의 이름으로' 중 채근의 대사

영화 '오피셜 스토리' 속 알리시아 가족은 행복하다. 입양한 딸 가비는 행복의 받침돌이다.

영화 '오피셜 스토리' 속 알리시아 가족은 행복하다. 입양한 딸 가비는 행복의 받침돌이다.


영화 '오피셜 스토리'.

영화 '오피셜 스토리'.

“한국에 가면 미얀마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알려주세요.” 2012년 만난 미얀마의 한 고위공무원이 환하게 웃으며 저에게 한 말입니다. 오랜 군부통치로 미얀마가 외국인의 눈에 부정적으로 비칠까 봐 저런 말을 던진 듯합니다. 민주화 운동의 상징 아웅산 수치가 가택연금에서 풀려나는(2010년 11월) 등 미얀마에 자유의 바람이 막 불던 때라 미래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던 듯합니다. 부침이 있었지만 미얀마는 지난 10년 동안 민주국가를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난 2월 1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시계바늘은 1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합니다.

지난 11일로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한지 100일이 됐습니다. 미얀마 국민들이 목숨 걸고 시위를 벌여도 군부는 요지부동입니다. 미얀마 저항시인 켓 띠가 경찰에 끌려갔다가 장기가 적출된 채 시신으로 가족에게 돌아왔다는 뉴스가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에겐 각별한 5월이라 미얀마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가슴이 더욱 아픕니다.

공교롭게도 5월하면 민주화를 떠올리며 눈물 흘릴 나라가 또 있습니다. 아르헨티나입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라고 들어보셨는지요. 1970년대 군부통치 시절 실종된 자녀들을 찾는 아르헨티나 어머니들의 모임으로 군부통치 종식을 앞당기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5월 광장에서 정기적으로 시위를 해 ‘5월 광장의 어머니회’였습니다. 오늘은 이 모임을 소재로 한 아르헨티나 영화 ‘오피셜 스토리’(1985)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나온 지 36년 됐지만 여전히 강한 울림을 주는 작품입니다.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영화로 IPTV와 웨이브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①양녀는 누구의 딸이었을까

1983년 아르헨티나 군부통치가 저물어가던 시기가 배경입니다. 주인공 알리시아는 고등학교 역사 교사입니다. 남편 로베르토는 고위공무원입니다. 이들에게는 입양한 5세 딸 가비가 있습니다. 알리시아 가족은 풍족하고 행복한 일상을 영위합니다. 알리시아에게는 사회나 정부에 대한 비판의식이 딱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알리시아의 평화로운 삶은 오랜 친구 아나를 만나면서 흔들립니다. 아나는 7년 전 알리시아에게는 아무런 말도 없이 아르헨티나를 떠난 후 유럽에 머물러왔습니다. 알리시아와 아나는 술을 마시며 쌓인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아나는 급작스레 외국으로 나간 이유를 알리시아가 묻자 눈물을 흘리며 과거를 떠올립니다.

아나는 7년 전 군인에게 끌려가 36일 동안 감금된 채 고문을 당했습니다. 2년 동안 연락도 없던 반체제적인 전 남자친구 페드로 때문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려도 여전히 “물고문 당하는 느낌”인 아나는 감금 상태에서 본 처참한 광경을 말하기도 합니다. 끌려온 만삭의 여인이 출산을 하자마자 아기가 팔려나가는 걸 봤다는 겁니다. 알리시아는 “왜 나한테 그 말을 하지?”라며 얼굴을 붉히지만 마음이 어두워지고 강한 의문을 품게 됩니다. 사랑하는 가비가 민주화 운동을 하다 실종된 남녀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1976~1983년 아르헨티나는 어두운 시절을 겪는다. 군부통치로 많으 사람이 실종됐다. 어머니들이 용기를 내 아들 딸 찾기에 나섰다.

1976~1983년 아르헨티나는 어두운 시절을 겪는다. 군부통치로 많으 사람이 실종됐다. 어머니들이 용기를 내 아들 딸 찾기에 나섰다.


영화 '오피셜 스토리'.

영화 '오피셜 스토리'.


②아르헨티나의 ‘더러운 전쟁’

1976년부터 1983년까지 이어진 군부통치 시절 아르헨티나에서는 3만명 가량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이들은 군인과 경찰에 끌려간 뒤 지인들의 시야에서 종적을 감췄습니다. 사람들은 분노했지만 숨죽이고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괜히 문제제기를 했다가 자신도 험한 상황에 처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아르헨티나 사회를 짓눌렀습니다.

용기를 낸 이들이 있었습니다. 실종자들의 어머니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977년 자신들의 아들 딸 사진을 붙인 피켓을 들고 5월 광장에 나섰습니다. 처음엔 사라져버린 아들 딸을 찾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이내 반정부 시위로 진화했습니다. ‘5월 광장의 어머니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군부는 탄압으로 맞섰으나 어머니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민간정부가 들어선 후 군부의 야만적 행태가 드러났습니다. 군부는 무단으로 잡아온 사람 대부분을 비행기에 태운 뒤 그들을 산채로 대서양에 내던졌다고 합니다. 시체가 발견됐을 때 생길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런 무지막지한 ‘작전’을 펼쳤다고 합니다. 엄마가 감금 중에 태어난 아기 500명 가량은 아이가 필요한 가정으로 팔려나갔습니다. 군부와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정이 대상이었다고 합니다. 군부가 물러난 후 이 만행들은 ‘더러운 전쟁(Dirty War)’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질렀으니 ‘더러운’이라는 수식이 붙을 만합니다.

‘오피셜 스토리’는 알리시아가 재직하는 학교 행사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아르헨티나 국가가 울려 퍼지는데 당시 시대상을 돌아보면 가사가 역설적입니다. “들어라 신성한 외침을 자유, 자유, 자유/ 들어라 풀린 쇠사슬 소리/ 보아라 높여진 고귀한 평등…/ 위대한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만세!”

알리시아와 로베르토는 갈등한다. 알리시아는 남의 불행을 바탕으로 한 행복을 부정한다. 반면 로베르토는 누군가의 위에서 누리는 행복을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생각한다.

알리시아와 로베르토는 갈등한다. 알리시아는 남의 불행을 바탕으로 한 행복을 부정한다. 반면 로베르토는 누군가의 위에서 누리는 행복을 자신의 능력 덕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오피셜 스토리'.

영화 '오피셜 스토리'.


③남의 불행 바탕으로 한 행복

‘오피셜 스토리’는 아르헨티나 군부의 만행을 고발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알리시아 가족을 통해 독재정부 편에 섰던 사람들의 심리를 들추면서 불행한 과거사는 어떻게 해야 청산될 수 있는지 보여주려 합니다.

알리시아의 남편 로베르토는 독재정부를 위해 일하면서 여러 물질적인 혜택을 누립니다. 그는 가장으로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스페인내전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는 아버지는 무능한 이상주의자 취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 로베르토를 보며 아버지는 통탄 어린 말을 합니다. “(쿠데타로) 군대 그리고 내 장남은 횡재했지.” 도덕이나 사회정의보다 물질적 이익과 권력이 더 우선인 로베르토에게 가비는 전리품 같은 존재입니다. 군부에 충성해 얻은 대가인 거죠. 가비는 부당하게 얻은 권력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알리시아는 로베르토보다는 암묵적으로 군부에 힘을 보탭니다. 비참한 현실에 눈감는 대신 달콤한 삶을 누립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불행을 바탕으로 한 행복은 과연 진정한 행복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알리시아는 양심과 신앙을 저버리고 택한 거짓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걸 깨닫습니다. 과거 잘못을 직시하고 바로잡아야만 새로운 삶을 얻을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로베르토는 알리시아와 달리 생각하지만, 결국 그가 구축했던 삶은 순식간에 무너집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철저히 이용해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한 결과입니다. 로베르토는 권력을 탈취하고 국민을 억압한 군부의 말로를 상징합니다.

알리시아는 수업 중에 이런 말을 합니다. “역사를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세계 상황을 배운다.” 역사는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국민의 행복을 짓밟고 들어선 정권은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역사의 순리가 미얀마에서도 실현되길 기원합니다.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