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도 못 쓰는데 백신 휴가는 무슨..." 휴식의 양극화 '씁쓸'

입력
2021.05.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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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부터 시작된 백신 휴가...의무 아닌 권고
중기·영세사업장 시행 현실적으로 어려워
7월 대기업 본격 시작하면 '휴식 양극화' 우려
구체적 유인책과 실현할 수 있는 환경 필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조합원들이 3월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린 '모든 병원·돌봄노동자에게 백신접종 확대와 백신휴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조합원들이 3월 서울 종로구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열린 '모든 병원·돌봄노동자에게 백신접종 확대와 백신휴가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에서 피켓을 들고 있다. 뉴시스

지난달 1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휴가'가 도입된 지 한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백신을 맞고 이상반응이 나타나면 누구나 쉴 수 있게 한다는 취지지만 이상이 있다고 해서 자유롭게 휴가를 쓸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백신 휴가가 '의무'가 아닌 '권고' 사항이기 때문이죠.

당초 정부가 휴가 시행을 발표했을 때도 공공 사회만 휴가를 사용하고 민간은 휴가를 사용할 수 없을 것이란 회의론이 커졌어요. 그러는 사이 민간 기업 종사자들의 백신 접종이 많지 않아 관심에서도 멀어졌습니다.

하반기부터 일반인들의 백신 접종이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대기업을 중심으로 일부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휴가 도입을 검토하는 분위기입니다.

가장 먼저 IT(정보기술) 업계가 백신 휴가 도입을 결정하고 나섰습니다. 네이버는 개인 연차가 줄어들지 않은 공가 유급 휴가를 하루 부여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죠.

국내 대표 대기업인 삼성전자도 최근 사내 게시판에 백신 휴가 기준을 알렸어요. 삼성전자는 전 직원에게 백신 접종 당일부터 최대 3일까지 유급 휴가를 주기로 했습니다.

대기업들이 백신 휴가 도입을 선도하면서 다른 기업들로 백신 휴가가 확대될 것이란 관측이 나옵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백신 휴가가 자칫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양극화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걱정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어요.

본격 도입을 눈앞에 둔 백신 휴가, 그 명암을 짚어봅니다.

'백신 휴가'가 뭐길래

30세 이상 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달 28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에서 육군 수도군단 장병들이 백신을 맞은 뒤 부작용 확인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성남=연합뉴스

30세 이상 군 장병을 대상으로 한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달 28일 경기 성남시 국군수도병원에 마련된 예방접종센터에서 육군 수도군단 장병들이 백신을 맞은 뒤 부작용 확인을 위해 대기하고 있다. 성남=연합뉴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3월 28일 '코로나19 백신 이상반응 휴가 활성화' 방안을 발표했습니다.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후 이상반응 때문에 정상적으로 일을 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휴가를 주겠다는 취지죠.

백신 휴가는 그동안 코로나19 백신 접종 뒤 발열과 통증 등으로 일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문제점이 떠오르면서 그 필요성이 제기됐습니다. 백신 접종 후 면역반응 강도가 예상보다 강하다는 호소가 여기저기서 나왔죠. 특히 젊은층에서 불편감을 토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실제 질병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2월 26 이후로 백신을 맞은 1만8,000명 중 32%가 불편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이 중 2.7%는 의료기관을 방문했어요. 무작위로 추출한 요양병원 20곳의 접종자 5,400명을 조사했더니 전체의 1.4%가 이상반응으로 하루 정도의 연차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주요 이상반응은 접종 부위 통증이 28.3%로 가장 많았습니다. 근육통 25.4%, 피로감 23.8%, 두통 21.3%, 발열 18.1% 순이었습니다. 대부분 접종 후 10~12시간 이내에 나타나고, 48시간 이내에 회복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누가, 어떻게 사용하나?

경찰, 해양경찰, 소방 등 사회필수인력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에서 광진경찰서 경찰관들이 백신 접종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경찰, 해양경찰, 소방 등 사회필수인력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접종이 시작된 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광진구 혜민병원에서 광진경찰서 경찰관들이 백신 접종을 기다리고 있다. 연합뉴스

정부 지침에 따르면 백신 휴가는 연차 휴가가 아닌 별도의 유급 휴가나 병가가 원칙입니다. 백신 종류와 관계없이 사용할 수 있어요.

신청자는 의사 소견서 등 별도 증빙자료 없이, 신청만 하면 휴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의료기관 진단서나 확인서를 요구할 경우 접종자 대다수가 의료기관으로 몰릴 가능성을 우려해 이같이 결정한 것이죠.

휴가는 최장 이틀까지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백신 접종 후 이상반응이 이틀 이내 호전되는 것을 감안했다는 설명입니다.

기간은 이상반응 여부에 따라 1+1일로 정했습니다. 접종 후 10~12시간 내 이상반응이 나오는 점을 고려해 이상이 있을 시 접종 다음 날부터 휴가 1일을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이상반응이 이어질 경우 추가로 하루를 더 받게 한 겁니다.

만약 이상반응이 이틀(48시간) 이상 계속될 경우 반드시 의료기관에 방문해야 하는 점을 고려한 것이죠.

손영래 보건복지부 중앙사고수습본부 사회전략반장은 "백신 접종 후 이상반응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며 "이상반응 때문에 출근이 어렵다면 그때 신청받고 별도 증빙자료 없이 하루 정도 휴가를 당연히 부여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4월부터 백신 접종이 시작된 보건교사, 6월 접종을 시작하는 경찰, 소방, 군인 등 사회필수인력은 인사혁신처, 행정안전부 등 복무규정 해석을 통해 병가를 적용해왔습니다. 사회필수인력의 경우 정부의 복무 규정에 따라 병가를 적용합니다.

정부 권고안에 따르면 기업 등 민간 부문은 임금 손실이 없도록 별도 유급 휴가를 줍니다. 병가 제도가 있는 기업은 병가를 활용하도록 권고했죠.

중소기업·영세 업체엔 '무늬만' 휴가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문제는 모든 대상자가 백신 휴가를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이죠. 의무사항이 아니라 사업자의 재량에 따라 휴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면서입니다.

취지는 좋지만 일하는 환경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백신 휴가 시행에 제약이 따르는 상황입니다. 강제가 아니니 휴가 시행을 거부해도 사실상 제재할 방법은 없는데요.

일단 이미 접종을 시작한 한 특수교육 종사자 및 교사, 어린이집 교직원과 간호인력의 경우 대체 인력 확보가 어려워 휴가 사용이 어렵습니다. 또 근로기준법 적용대상에서 빠진 플랫폼 노동자, 특수고용직 등 사각 지대에 있는 대상자들도 사실상 백신 휴가를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이죠.

중소기업이나 영세사업장 등 일하는 인원 자체가 적은 현장 역시 백신 휴가 사용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 때문에 7월 민간 영역에서 본격적으로 백신 접종이 시작되더라도 제도가 의무가 아닌 권고 수준에 머물러서는 이들이 백신 휴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옵니다.

그렇다고해서 '의무'로 정하면 '형평성 논란'이 생길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주장입니다.

손 반장은 이와 관련 "정규직 근로자가 아닌 특수형태근로종사자나 프리랜서, 가사 노동에 종사하는 주부 등에 대해서는 휴가를 부여할 방법이 없다"며 "현 상황에서 의무 휴가를 적용하면 오히려 직업·업종별 형평성 논란을 야기할 위험도 있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백신 휴가 도입 내용을 담은 '감염병예방법' 개정안이 지난달 27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했지만 국회 본회의를 통과할지는 미지수입니다.

개정안에는 자영업자와 일용직 노동자도 백신 접종 후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담겼지만 정부 예산 부담을 둘러싸고 정치권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어요.

직장 따라 '휴식의 양극화' 우려 커져

낮 기온이 30도까지 치솟는 등 연일 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13일 서울역 임시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검체검사를 하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뉴스1

낮 기온이 30도까지 치솟는 등 연일 여름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13일 서울역 임시선별진료소에서 의료진이 검체검사를 하던 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뉴스1

반면 대기업들은 코로나19 백신 휴가 도입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네이버는 7월부터 전 계열사에 백신 휴가제를 시작한다고 예고했고, NHN도 5일부터 백신 휴가를 도입했습니다. 카카오 역시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삼성전자도 사내 공지를 통해 백신을 맞는 전 직원에게 접종 당일 하루 유급 휴가를 보장하고, 이상반응이 있을 시 접종 후 이틀까지 유급휴가를 사용할 수 있게 하는 휴가 기준을 발표했습니다.

LG그룹은 이상반응 여부와 상관없이 접종 당일과 다음 날까지 이틀간 유급 휴가를 지급한다고 밝혔죠. 계열사별로 추가 휴가를 지급하는 것도 가능케 했습니다.

SK이노베이션, SK하이닉스 등 SK그룹 계열사, 현대자동차그룹 등도 백신 휴가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휴가 시행을 공식화한 곳 상당수가 대기업 혹은 IT 계열 회사라는 점에서 일각에서는 양극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재택근무와 같은 근무 유형 차이로 큰 박탈감을 느낀 데 이어 회사에 따라 누구는 휴가를 내고 누구는 이상반응을 참으며 일하는 '휴식의 양극화'까지 생기면 박탈감이 더 깊어질 수 있을 것이란 지적입니다.

실제 중소기업 종사자들의 절반 가까이는 코로나 확산이 길어지면서 대기업과 양극화가 악화한 것으로 체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소기업 중앙회가 3월 5~18일 중소 제조업체 500곳을 설문조사한 결과 43.8%는 코로나 사태 이전 대비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양극화 상황이 '나빠졌다'고 답했습니다.

온라인에서도 코로나19로 인한 근무 환경, 휴식의 양극화를 호소하는 직장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회원(SS***)은 "백신 휴가는 딴 세상 이야기"라며 "있는 휴가도 잘 못 쓰는데 권고면 백신 휴가를 어떻게 쓰라는 말이냐. 연차를 사용해서라도 쉬면 고마울 지경"이라고 꼬집었습니다. 다른 회원(교***)도 "대기업 직원들이 재택근무할 때 중소기업 직원들은 감염 위험을 뚫고 출퇴근했다"며 "어정쩡한 제도 때문에 상처만 입는다"고 한탄했습니다.

백신 휴가제 도입 취지에 맞게 인센티브 등 지켜질 수 있는 환경 조성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죠.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과 교수는 "휴가자의 인력을 대체하기 위해 고용자에게 인센티브를 지급한다는 등 구체적 유인책 없이는 근무 환경에 따라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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