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소주로 팔려간 순둥이…남은 40마리의 운명은

입력
2021.05.13 10:30
수정
2021.05.13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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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순하고 예쁜 아이였는데 이틀 뒤 가보니 개소주로 팔려갔더라고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지역 주민과 봉사자들이 나서게 됐습니다."

충남 당진 유기동물봉사자 송인선씨

충남 당진시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한 한 개농장에서 잔반을 먹으며 살던 개가 서 있다. 밥그릇에 남아 있는 사료는 구조하기 전 지역 주민과 봉사자들이 준 것이다. 80대 A씨는 8년간 방치하며 키운 개들을 개장수에 팔았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충남 당진시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한 한 개농장에서 잔반을 먹으며 살던 개가 서 있다. 밥그릇에 남아 있는 사료는 구조하기 전 지역 주민과 봉사자들이 준 것이다. 80대 A씨는 8년간 방치하며 키운 개들을 개장수에 팔았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2일 오전 10시, 충남 당진시 정미면 소재 하늘색 벽의 작은 집 앞마당. 20여 마리의 개들이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 우렁차게 짖어댔다. 연두색 철창 안 견사에는 꼬리를 흔들며 사람을 반기는 개들도, 두려워하는 듯한 개들도 있었다. 지역 봉사자들과 동물자유연대 활동가들, 버려진 동물을 위한 수의사회(버동수) 소속 수의사들은 이곳에 지내는 24마리와 임시보호가정에 있는 13마리, 동네 마당개 등 총 40여 마리 개들의 중성화수술을 하기 위해 오전부터 분주히 움직였다.

떠돌이개 40여 마리가 잔반을 먹으며 지내고 있는 충남 당진시 소재 한 주택의 모습. 동물자유연대 제공

떠돌이개 40여 마리가 잔반을 먹으며 지내고 있는 충남 당진시 소재 한 주택의 모습. 동물자유연대 제공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개의 분변과 오물이 가득하고, 악취가 심해 접근조차 힘들었던 곳이다. 지난 8년간 수십여 마리의 개들은 잔반을 먹으며 동네를 떠돌아 다녔고, 어느샌가 개장수에게 팔려갔다. 이곳을 관리하던 80대 남성 A씨의 용돈벌이 신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식용개가 아닌 반려견으로서의 삶을 꿈꾸는 희망의 장소가 됐다.

동네고양이 밥 먹으러 오던 떠돌이개들

충남 당진 정미면의 한 주택 뜬장에서 잔반을 먹으며 길러지던 강아지들. 송인선씨 제공

충남 당진 정미면의 한 주택 뜬장에서 잔반을 먹으며 길러지던 강아지들. 송인선씨 제공

당진에 거주하며 동네고양이(길고양이) 밥을 챙기는 여미현(57)씨는 지난해 6월부터 떠돌이개들이 밥자리 주변에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고양이에게 주려고 놓아둔 사료를 먹으로 온 것이다. 여씨는 "수소문해보니 한 할아버지가 개들에게 먹인다며 식당을 돌며 잔반을 거둬가고 있었다"며 "지난해 말 우연히 떠도는 개들의 본거지가 이곳임을 알게 돼 그때부터 매일 사료를 갖다 주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개들의 상태는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쓰레기로 가득한 집안과 마당, 별도로 만들어진 뜬장 여기저기에 개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극심한 피부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봉사자 송인선(41)씨는 "마당 구석에는 쥐 사체뿐만 아니라 개 사체까지 발견됐다"며 "마스크를 3개씩 껴도 악취를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고 했다. 개들은 집 안에서만 머물지 않고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른 동네까지 떠도는 상황이었다.

"개들을 살리자" 뜻 모은 지역 주민들

쓰레기가 가득한 집 안에서 방치된 채 길러진 강아지들. 동물자유연대 제공

쓰레기가 가득한 집 안에서 방치된 채 길러진 강아지들. 동물자유연대 제공


추위가 극심했던 1월 초 여씨는 뜬장에 갇혀 지내던 개 4마리가 동사한 사실을 확인하곤 사료만 줘서는 이 개들을 구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동네고양이를 돕는 온라인 카페에 도움을 요청했고, 곧바로 10여 명의 주민과 타지역 봉사자들이 모여 개들을 돕기 위해 머리를 맞댔다.

사람 손을 타지 않았던 개들이지만 대부분 순하고 사람을 잘 따랐다. 주민과 봉사자들은 먼저 개들에게 구충약을 먹이고, 피부병을 치료했다. 매주 태어나는 강아지와 만삭인 엄마개는 우선 임시보호가정이나 위탁소로 보냈다.

하지만 쓰레기로 가득한 공간을 쉼터로 바꾸기 위해선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했다. 주민들은 1월 중순 동물보호단체 동물자유연대(동자연)에 도움을 요청했고, 현장을 둘러본 활동가들은 열악한 환경에 놓인 개들의 구조를 돕기로 했다.

지역 주민과 동물단체, 기업의 협업

지난달 22일 포스코 벽화봉사단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지난달 22일 포스코 벽화봉사단이 벽화를 그리고 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지역 주민과 동물단체가 개를 구조하는 데 나섰지만 난관이 남아 있었다. 개들의 소유권을 갖고 있는 할아버지, 그리고 이곳 땅 소유주의 허가였다. 먼저 지역 주민들은 수차례 할아버지를 만나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이후 땅 소유주에게는 개들의 쉼터를 허용해줄 것을 요청했고, 저렴한 비용으로 임대해준다는 약속을 받았다.

4월 초 쉼터 개선 작업이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개들을 포획하고, 견사를 지었다. 하지만 쓰레기로 가득한 주택 시설 개선을 위해선 인력과 비용이 부족했다. 정진아 동자연 사회변화팀장은 "동네고양이 급식소 설치 사업을 함께 진행했던 포스코에 도움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쉼터 개선작업에 동참해줬다"고 전했다.

포스코건설 서부내륙프로젝트 직원 10여 명과 지역주민, 동자연 활동가들은 지난달 7일부터 이틀에 걸쳐 외벽철거와 펜스 설치, 대청소 작업을 진행했다. 일주일 후 도배와 장판, 배선 등 내부 인테리어 공사까지 마쳤다. 지난달 22일에는 포스코 벽화봉사단이 벽을 하늘색으로 칠하고, 행복하게 웃는 개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이 벽은 이제 이곳의 랜드마크가 됐다.

더 이상의 증가는 막자…중성화의 날

2일 충남 당진시 정미면 떠돌이개를 위한 쉼터에서 지역 봉사자와 버려진 동물을 위한 수의사회(버동수) 소속 수의사들이 중성화수술을 준비하고 있다. 고은경 기자

2일 충남 당진시 정미면 떠돌이개를 위한 쉼터에서 지역 봉사자와 버려진 동물을 위한 수의사회(버동수) 소속 수의사들이 중성화수술을 준비하고 있다. 고은경 기자

2일 오전 10시 10분. 20여 명의 버려진 동물을 위한 수의사회(버동수) 소속 수의사와 충남대, 건국대 수의대생, 수의테크니션(간호사)들의 손길이 바빠졌다. 집 안은 순식간에 수술장으로 바뀌었다. 수술을 앞둔 개들의 꼬리에는 수술 번호가 적힌 흰색 종이 테이프가 감겼다. 간이 테이블이 수술대가 되고, 사료 포대와 과자 박스가 침대와 베개로 사용되는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중성화수술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몸무게 18kg가량의 백구 '곰돌이' 중성화 차례가 왔다. 1~2세로 추정되는 강아지로 지금껏 사람 손을 탄 적이 없었지만 봉사자 박제원(42)씨의 노력 덕에 목줄도 걸고 조금씩 산책도 가능해졌다. 박씨는 곰돌이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마당을 거닐고 쓰다듬어줬다. 덕분에 곰돌이는 무사히 중성화수술을 마쳤다. 사람에게 친숙하지 않으면 중성화를 위한 포획작업부터 쉽지 않은데, 박씨를 포함한 봉사자들 덕분에 모든 과정이 수월했다.

2일 충남 당진 지역 봉사자 박제원씨가 중성화 전 '곰돌이'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다. 곰돌이는 잔반을 먹으며 떠돌았고 사람 손을 타지 않았지만 박씨의 노력으로 사람을 조금씩 따르게 됐다. 고은경 기자

2일 충남 당진 지역 봉사자 박제원씨가 중성화 전 '곰돌이'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다. 곰돌이는 잔반을 먹으며 떠돌았고 사람 손을 타지 않았지만 박씨의 노력으로 사람을 조금씩 따르게 됐다. 고은경 기자

버동수 운영진 명보영 수의사는 "코로나19로 수의사들이 모이기 힘든 상황이었다"며 "중성화가 시급하다는 점을 고려해 수의사뿐만 아니라 수의대생들까지 봉사에 동참해 무사히 중성화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평생 가족을 기다리는 개들

2일 충남 당진 떠돌이개를 위한 쉼터에서 중성화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개들. 고은경 기자

2일 충남 당진 떠돌이개를 위한 쉼터에서 중성화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개들. 고은경 기자

개들의 목숨은 건졌지만 계속 쉼터에서 지낼 수는 없다. 이에 지역 주민과 봉사자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봉사자를 모집하는 한편 입양가족을 찾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충남 당진시에서 구조된 40여 마리의 개들이 새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송인선씨 제공

충남 당진시에서 구조된 40여 마리의 개들이 새 가족을 기다리고 있다. 송인선씨 제공

송인선씨는 "아이(개)들을 모두 좋은 가정으로 입양 보내기 전까지 계속해서 돌볼 예정이다"며 "당장 입양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서는 1대1 결연을 맺고 후원할 수 있는 대부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중대형 믹스견의 경우 국내에서 입양처를 찾기 쉽지 않다"며 "북미와 유럽 쪽 단체를 통한 해외 입양도 고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당진=고은경 애니로그랩장 scoopkoh@hankookilbo.com

고은경 애니로그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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