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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보험과 4만 그루

입력
2021.05.11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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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숲, 산림 ⓒ게티이미지뱅크

숲, 산림 ⓒ게티이미지뱅크

국민건강보험이 보장하지 못하는 의료비(본인부담금과 비급여의료비)를 지급하는 실손의료보험은 가입자가 4,000만 명이나 된다. 연간 보험금 청구 건수도 1억 건 안팎이다. 이처럼 국민 생활과 밀접한 상품이지만 보험금 청구 절차는 미개하고 불편하기 짝이 없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병원에서 영수증과 진료비 세부내역서 등을 문서로 발급받은 뒤 이를 다시 보험사로 보내야만 한다. 사람들은 일일이 팩스로 전송하거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보낸다. 이 과정이 복잡하고 번거로워 아예 단념하는 경우도 많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손보험 청구를 포기한 적이 있다는 응답이 절반에 달했다. 다시 병원에 갈 시간이 없거나 서류를 보내는 게 귀찮기 때문이다.

□ 해결책은 간단하다. 소비자가 신청할 경우 병원에서 곧장 보험사로 증빙자료를 보내는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를 도입하면 된다. 이러한 논의가 시작된 게 벌써 12년 전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2009년 요양급여 운영체계 제도개선안을 통해 실손보험금의 서면 청구에 따른 행정적·경제적 낭비가 심하다며 관리시스템 개선을 권고했다. 경실련 등 시민단체들도 해마다 기자회견과 성명 발표를 통해 실손보험 청구 전산화를 촉구하고 있다.

□ 그럼에도 그동안 개선되지 않은 건 의료계의 반대와 당정의 직무 유기 탓이 크다. 의료계는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한다. 기본적으로 의료기관이 개별 보험금 청구 서류 전송의 주체가 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국회와 정부는 이러한 의료계 반발에 눈치만 보면서 허송세월했다.

□ 올해도 실손보험금 청구 과정에서 필요한 종이는 4억 장에 달할 전망이다. 발급받아 사진만 찍으면 사실상 버려지는 서류다. 국민적 불편, 국가적 낭비도 문제지만 지구 환경도 파괴한다. 통상 30년생 나무 한 그루로 A4 용지 1만 장을 만든다고 한다. 4억 장의 종이를 아낄 수 있다면 4만 그루의 나무를 살릴 수 있다. 4차 산업 혁명 시대 정보기술(IT) 강국에서 언제까지 서류를 떼야 하나. 은성수 금융위원장의 말대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개정안도 발의됐다. 이젠 눈치 보지 않는 국회, 제 할 일 하는 정부를 보고 싶다.


박일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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