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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지재권 풀자" 美 배신에… '자중지란' 유럽, "우리가 옳았다" 中·러

입력
2021.05.08 04:30
수정
2021.05.08 08:57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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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백신 특허?면제, 美·獨·中·러 '4색']
리더십 욕심 바이든 파격 제안에 EU 곤경
자국 제약사 개발 성패 따라 입장 엇갈려
中, "정치 술책" 폄하… 푸틴 "러 백신 최고"
화이자 CEO "의미 없어… 되레 생산 방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 개발을 주도한 미국이 백신의 지식재산권 면제를 지지하자 독일이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들고 나왔다. 유럽연합(EU)이나 영국ㆍ스위스 등 다른 제약 강국들이 미국의 구상에 제동을 걸고 나선 형국이다.

초유의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 사태를 극복하고 빈국들의 백신 부족을 해소하려면 복제약이 쉽게 만들어지도록 제약사로부터 특허권을 잠시나마 회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갈수록 힘을 얻고 있지만, 문제는 ‘독점이 혁신 동기를 부여한다’는 자본주의 신념과 이 주장이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백신 지재권을 풀자”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제안은 ‘불온한 파격’이면서 서방에는 ‘배신’과 다름없게 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경제 부양을 위한 '미국 구조 계획' 이행 상황에 대한 연설을 한 뒤 취재진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5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경제 부양을 위한 '미국 구조 계획' 이행 상황에 대한 연설을 한 뒤 취재진 질문에 대답하고 있다. 워싱턴=AP 연합뉴스


“지재권은 혁신의 원천”… 독일의 반기

미국은 진작부터 수세에 몰려 있었다. 최근 인도의 상황이 급격히 악화하면서 글로벌 리더 자격을 인정받고 싶으면 자국민만 챙기지 말고 쌓아 둔 백신을 다른 나라와도 나눠야 하지 않겠냐는 국제사회의 압박이 커질 대로 커진 상태였다. 미국과 달리 개발도상국에 백신을 지원하며 영향력을 키우는 체제ㆍ패권 경쟁국 중국과 러시아의 적극적인 ‘백신 외교’ 행보도 부담이었다. 5일(현지시간) 기자회견에서 바이든 대통령이 오랜 망설임 끝에 백신 지재권 면제 지지 쪽으로 입장을 정리한 배경이다.

‘특허권 보호 카르텔(담합)’ 일원이 암묵적 협정을 박차고 나가자 곤혹스러워진 건 같은 이해(利害)로 묶여 있던 백신 선진국들이었다. 노골적으로 반기를 든 나라는 독일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당장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강하게 반대했다고 6일 보도했다. 독일 정부는 대변인 성명에서 “백신 생산을 제약하는 요소는 특허가 아니라 생산 능력과 높은 품질 기준”이라며 “혁신의 원천인 지재권은 앞으로도 보호돼야 한다”고 했다. 영국 가디언은 독일이 백신 지재권 면제에 반대하며 미 바이든 행정부 출범 뒤 처음으로 양국 간에 심각한 균열이 생겼다고 평가했다.

불만을 품은 나라는 독일만이 아니다. 스위스 연방 국가경제사무국(SECO)도 6일 “세계무역기구(WTO) 틀 내에서 해결책을 논의하는 데 열려 있고 미국의 제안을 평가하겠지만 미국이 고려 중인 구체적 해법에 의문점이 많다”고 했다. 반색하지 않기는 영국도 마찬가지다. “백신 생산과 공급을 촉진하기 위해 미국 및 WTO 회원국들과 논의를 진행해 왔다”는 원론적 반응뿐이었다. 다만 스위스ㆍ영국이 EU 회원국은 아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6일 베를린 총리 관저에서 화상을 통해 제12차 페터르스베르크 기후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베를린=AFP 연합뉴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6일 베를린 총리 관저에서 화상을 통해 제12차 페터르스베르크 기후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베를린=AFP 연합뉴스

하지만 EU 회원국 대다수는 미국 제안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게 독일 DPA통신 보도다. 특히 독일과 함께 EU의 양대 축인 프랑스가 찬성파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6일 기자들과 만나 “백신을 공공재로 만들어야 한다. 단기적으로 물량을 풀고 이후 저소득 국가들과 협력해 백신을 생산해야 한다”고 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도 “코로나 사태 종식에 지재권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탈리아 역시 찬성 편이다.

엇갈리는 각국 입장은 자국 제약사의 백신 개발 성패 때문일 공산이 크다. 미 제약사 화이자와 함께 ‘메신저 리보핵산’(mRNAㆍ전령RNA) 방식의 백신을 개발한 바이오엔테크, 화이자ㆍ바이오엔테크, 모더나(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mRNA 백신을 출시하려 현재 막바지 준비 중인 큐어백이 독일 업체다. 영국은 자국 옥스퍼드대 주도로 개발되고 자국에 본사가 있는 제약사 아스트라제네카(AZ)가 생산하는 백신을 자국 백신으로 여긴다. 반면 프랑스 제약사 사노피는 사실상 백신 개발에 실패했다.

현재 유럽은 난감한 처지다. 자중지란을 수습하고 지재권 면제에 대한 입장을 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7, 8일 포르투갈 포르투에서 열리는 EU 정상회의에서 의제로 다뤄질 예정인데, 주도국인 독일이 뜻을 굽히지 않을 경우 EU 전체가 도덕성에 타격을 입게 된다.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바이든 대통령의 ‘폭탄 선언’이 EU를 초국적 제약사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악당으로 보이게 만들었다”고 논평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월 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폐막식에 참석해 박수치고 있다. 베이징=로이터 연합뉴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3월 10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폐막식에 참석해 박수치고 있다. 베이징=로이터 연합뉴스


‘백신외교’ 공들이던 中, 美 가세에 ‘떨떠름’

과거 공산주의를 이끌던 중국과 러시아에 ‘자본주의 첨병’ 미국의 전향은 체제 우위의 입증일 수 있다. 그러나 현실적 이익만 따지면 반길 수만은 없다. 특히 중국의 떨떠름한 기색이 역력하다. ‘자국 우선주의’ 비판으로 확보했던 도덕적 우위가 약해질 뿐 아니라 1년간 공들인 백신 물량 공세의 효과도 반감되게 생겼기 때문이다.

액면상 반응은 환영과 지지다. 그러나 이면은 폄하와 경계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7일 “백신 지재권을 면제한다는 미국의 방침은 정치적 술책에 불과하다”고 혹평했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은 6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과의 통화에서 “소규모 패거리 집단을 만들어 이념 대결을 해서는 안 된다”며 “일방주의ㆍ패권주의에 가담하지 말고 정치적 농간이 아닌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 독주가 못마땅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대인배’로 보인다. 6일 “지재권 면제 구상을 지지한다”며 자국 정부에 이 문제를 검토하라고 주문했다. “이익뿐 아니라 사람들의 안전 확보도 생각해야 한다”면서다. 그는 자체 개발한 백신 생산 기술을 다른 나라에 나눠주는 유일한 나라가 러시아라며 “러시아 백신은 (러시아산) 칼리시니코프 자동소총(AK-47)처럼 단순하고 성능을 신뢰할 수 있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모스크바에서 연례 대의회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로이터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21일 모스크바에서 연례 대의회 국정 연설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로이터 연합뉴스

지재권 면제 구상이 현실화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난관이 수두룩하다. 일단 기술 격차다. 앨버트 불라 화이자 최고경영자(CEO)는 7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 인터뷰에서 “특허의 일시 포기는 의미가 없다. 오히려 생산을 늦출 수 있다”고 했다. 자사 말고는 최신 기술이 적용된 mRNA 백신 생산 가능 설비를 보유한 곳이 없는 데다, 갑자기 여러 나라가 백신을 만들겠다고 나서면 도리어 원료만 부족해지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WTO의 결정 구조도 장애물이다. 지재권 면제 권고를 위해서는 164개 회원국 만장일치가 필요하다. 결정이 지연되는 동안 제약업체들이 백신 공급량을 늘리면 특허 포기 압박이 줄어들 수 있다고 로이터는 내다봤다. 결국 제약사가 바란 대로 될 거라는 얘기다.

권경성 기자
베이징= 김광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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