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우주는 무한합니다. 여기에 알록달록 다양한 빛깔을 더해줘야 할 동화책과 교과서, 애니메이션이 되레 이 세계를 좁히고 기울어지게 만든다면요? 한국일보는 4회에 걸쳐 아동 콘텐츠의 '배신'을 보도합니다.
부모들은 어린 자녀 앞에선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조심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쁜 것도 금새 흡수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아이들이 보는 책에는 부모가 조심했던 차별과 편견이 가득했습니다.
한국일보 마이너리티팀은 500여권의 아동 도서(베스트셀러, 전집류, 성교육 책 등)를 분석하며 성 역할 고정관념과 차별이 가득한 그림과 서사를 수없이 마주했습니다. 일부 오래전 책들도 공공도서관에서 아이들을 맞이하며 과거의 편견을 그대로 물려주고 있었죠. 그 중 앞의 기사에서 다 보도하지 못했던 장면들을 소개합니다.
‘이런 것도 문제야?’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고 사소해 보이지만, 악마는 디테일에 있습니다. 아이들은 의식하지 않아도 그 디테일을 그대로 흡수하죠. 이런 책을 본 아이들의 머릿속엔 어떤 그림이 새겨질까요.
'엄마'에게 유독 가혹한 그림책
3세 미만 영유아들이 주로 보는 '곰곰이 생활동화'(더큰) 전집 중 '도와 드릴게요' 책의 한 장면. 아침에 일어나 아빠에겐 신문을 갖다주고, 엄마에겐 베개 정리를 도와주는 것이 곰곰이가 부모에게 주는 도움이다. 엄마와 아빠의 아침 풍경은 언제까지 이렇게 달라야 할까.
'불가능은 없다 리더십동화'(한국톨스토이) 전집 중 '까치의 겸손' 책의 한 장면. 부모에게 조언을 하는 코너에 "요즘 엄마들은 아이의 인품보다는 남보다 앞서 가는 것에 관심이 많아요"라고 적혀있다. 요즘 엄마 전체를 싸잡아 '모욕'했다.
'로지에게 동생이 생겼어요'(삼성출판사)의 한 장면. 엄마는 아빠에게 "~튼튼해졌어요"라고 존댓말을 하지만 아빠는 "~되겠는걸"이라고 반말을 한다. 호주 동화책이 원작으로, 영어에는 존댓말과 반말의 구분이 없지만 번역 과정에서 엄마만 존댓말을 쓰게 됐다. 애니메이션에서도 엄마만 존댓말을 쓰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불가능은 없다 리더십동화'(한국톨스토이)는 책 마지막에 있는 문제를 엄마와 함께 풀어보도록 하고 있다. 아이들의 교육은 엄마가 전담하라는 얘기일까.
설치면 안 되는 여자? 청소년 남자에게조차 '마마보이'?
학습만화 '지진에서 살아남기'(코믹컴)의 한 장면. 코 고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자 "여자 애가 무슨 코고는 소리가 그렇게 크냐!"고 화를 낸다.(위의 빨간 네모) 왜 굳이 "여자 애가~"를 넣어야 할까? 빈 집에서 하루 묵게된 일행 중 아빠는 집에 여자옷밖에 없어서 여자옷을 입고 놀림을 받기도 한다.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조롱 당하는 경우는 없었다.
'소녀를 위한 사춘기와 성 80가지'(글송이)에는 '여자에게 인기 없는 남자'로 '엄마 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마보이' 등을 꼽았고, 남자에게 인기 없는 여자로 '푼수처럼 이리저리 설치는 여자' 등을 꼽았다. 기성세대의 편견을 고스란히 물려주고 있으며, 남자와 여자에게 모두 해당하는 내용도 굳이 남녀를 갈라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조한다. 특히 '마마보이' 낙인은 성인이 되기 전, 부모와 많은 것을 상의하는 청소년에게 "엄마와 가까우면 안된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다. 또 "설치면 안된다"는 표현은 남자에게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남자가 '설치는' 모습은 적극적이라고 표현될 것이다.
'너는 알고 있니? 사춘기의 비밀'(능인)의 한 장면. 17~19세 여자의 몸을 "여자로서 신체적 매력의 완성 단계. 일생 중 가장 아름다운 몸과 피부를 자랑하는 시기"라고 설명한다.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화와 매력의 관점에서만 다루고 있다.
'레오 대 레아'(웅진닷컴)의 한 장면. 왕은 "올해 안으로 자식을 낳지 못하면 왕비자리에서 쫓겨날 줄 아시오!"라고 협박하고, 왕비는 "아이를 낳지 못할까봐 내내 두려웠어요."라고 적혀있다. 아무리 과거를 배경으로 한 동화라고 해도 이런 폭력적인 설정은 그만 볼 때가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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