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의료원의 운명

입력
2021.05.04 18:00
수정
2021.05.04 18:21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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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서울 을지로6가에 위치한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중앙의료원 제공

서울 을지로6가에 위치한 국립중앙의료원. 국립중앙의료원 제공

서울 을지로6가 동대문의 고층 쇼핑몰 숲 사이에 나지막이 자리잡은 국립중앙의료원. 전국 응급의료센터의 환자 이송 업무조정, 공공보건 인력 교육 등 의료자원 관리의 핵심 역할을 하고 있지만 감염병이 유행할 때만 반짝 주목을 받는다. 최첨단 장비를 갖춘 대형 민간 병원들의 틈바구니에서 화장실도, 샤워실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중앙의료원(490병상)의 초라한 현실은 ‘공공의료의 산실’이라는 자부심을 무색하게 한다.

□ 이곳에도 영광의 시절이 있었다. 6ㆍ25전쟁 때 의료지원단을 파견했던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북유럽 3국이 의료진ㆍ경비를 지원해 1958년 10월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인 460병상으로 문을 연 중앙의료원은 10년 뒤 북유럽 의료진이 철수할 때까지 북유럽식 무상의료를 실시해 환자들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러나 이후 운영권을 넘겨받은 우리 정부는 공공의료에 대한 투자를 외면했고 1990년대 병원 대형화와 의료 상업화 바람이 거세지며 우수한 의료진 유출과 함께 쇠락의 길에 접어든다.

□ 정부는 이후 중앙의료원의 매각까지 추진했고 자활의 길을 모색하라며 결국 특수법인화했다(2010년). 시설 노후화로 2003년부터 시작된 이전 논의는 부지 무상임대 등을 놓고 논란이 불거지면서 지난해 말에야 겨우 인근 옛 미군 공병단 부지로 이전 부지가 결정되기도 했다. 다행히 메르스 사태를 겪은 정부는 병원 이전과 함께 800병상, 음압병상 100병상을 갖춘 중앙감염병 전문병원을 신설할 계획을 내놓으면서 중앙의료원의 위상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 지난주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의 유족이 감염병 전문병원 건립에 써 달라며 7,000억 원을 중앙의료원에 기부 약정하면서 관심은 더 높아지고 있다.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전문가들은 삼성의 기부로 정부가 기존에 확보한 이전 사업비(5,961억 원)를 삭감할 것을 우려한다. 의료원 측은 “1950년대 북유럽 3국이 중앙의료원에 투자한 예산이 지금 기준으로 1조 원쯤 된다”고 설명한다. 정기현 원장이 지난 3일 “고마운 일이나 (민간의 도움을 받는 건) 솔직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쓴소리를 한 이유다. 메르스와 코로나를 겪으면서도 감염병 전문병원 하나 못 세운 정치인과 관료들은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이왕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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