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명 숨지게 한 '희대의 방화범' 살려 낼 수밖에 없었던 의사

입력
2021.05.02 13:05
수정
2021.05.02 14:31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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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죗값을 치러라. 그것을 위해 널 치료한다”
"방화범 치졸했지만, 누군가 말 들어줬다면"

2019년 7월 18일 오전 10시 35분께 방화로 불이 난 교토시 후시미(伏見)구 소재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교토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건물에서 소방관들이 화재를 수습하고 있다. 교토=교도 연합뉴스

2019년 7월 18일 오전 10시 35분께 방화로 불이 난 교토시 후시미(伏見)구 소재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교토애니메이션' 스튜디오 건물에서 소방관들이 화재를 수습하고 있다. 교토=교도 연합뉴스

36명을 숨지게 한 방화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가 의식불명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왔다. 그를 살려낸 의사가 당시의 복잡한 심경을 회상한 이야기가 최근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2019년 7월 18일, 유명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인 교토애니메이션의 제1스튜디오(교토 후시미구 소재)에 한 남자가 침입, 양동이 2개 분량의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36명이 사망하고 33명이 중경상을 입어 일본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출판사 슈에이샤가 운영하는 인터넷 매체 '슈프레뉴스'에 따르면, 방화 용의자 아오바 신지(?葉?司)가 전신에 3도 화상을 입고 의식이 없는 상태로 긴키대학병원에 실려온 것은 이틀 뒤인 20일이었다.

화상전문의 우에다 다카히로(上田敬博)가 그를 맡았다. “먼저 느낀 것은 이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죽는다면 유족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조차 없게 된다. 하지만 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경찰관에겐 “포기하시라, 기대에 부응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하고 치료를 시작했다.

피부는 표피, 진피, 피하조직으로 구성되며, 3도 화상은 피하조직까지 파괴된 경우를 말한다. 먼저 콜라겐 등으로 만든 인공 진피 조직을 붙여나가고, 전신 중 약 8㎝정도밖에 남아있지 않았던 정상 표피 조직을 배양해 이를 다시 이식했다. 아오바는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을 넘기며 다섯 번에 걸친 배양표피 이식수술을 받았다.

아오바가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사건 발생 3개월 후인 10월 중순이었다. “어차피 나는 사형당한다”라고 말하는 그에게 우에다는 “나쁜 짓을 했다는 자각이 있다면 우선 자신이 한 행위와 맞서라. 그리고 죗값을 치러라. 그것을 위해 너를 구하겠다”라고 말했다.

우에다는 매일 오전 7시 반과 오후 7시, 두 번씩 주치의로서 아오바와 대화를 나눴다. 아오바는 “나는 최악의 인간이다,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고교 졸업 후 파견사원으로 일하던 그는 글로벌 금융위기로 해고당했다. 전부터 소설 등에 흥미가 있던 그는 2년에 걸친 습작 끝에 작품을 응모해 봤지만 떨어졌다. 그런데 교토애니메이션 작품 중 자신의 것을 표절한 게 있다고 느껴 분노 끝에 방화했다는 것이다. “치졸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의 말을 들어줬다면 그 전에 방화를 멈췄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우에다는 말했다.

경찰 조사를 받을 만큼 상태가 호전돼 11월 아오바는 다른 병원으로 이송됐다. 헤어질 때 우에다는 “전에는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고 말했지만, 조금은 생각이 바뀌었나”라고 물었다. 아오바는 이렇게 답했단다. “변할 수밖에 없었다. ‘최하 중에서도 최하인’ 나에게도 부딪쳐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해 11월 8일 첫 조사에서 아오바는 “남들이 이렇게 잘해준 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병원 의료팀을 고마워했다고 경찰은 전했다.

도쿄= 최진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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