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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의 '직설화법'이 전하는 시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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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 왜 재미없게 살아? 인생 길지 않아, 그냥 즐겨!"
2016년 9월의 어느 날.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일명 '박카스 할머니'를 연기했던 배우 윤여정(74)과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당시 데뷔 50주년이었던 그는 파격 연기로 호평을 받았지만, 연기 생활 중 가장 우울했던 경험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렇게 인터뷰가 끝날 때쯤 "인생 별것 없어 허무해보이더라고" 하는 그에게, 기자는 "인생의 낙이 없다, 빨리 늙고 싶다"고 하소연했다.
그러자 눈을 동그랗게 뜬 윤여정은 "인생을 즐기라"며 조언했다. 그러면서 작별인사 하며 자리를 뜨기 직전까지 기자를 토닥였다. "나 이따가 장명수(전 한국일보 사장) 언니 만나기로 했어. 그 언니는 참 여장부야. 여성으로서 대단해. 여자들은 나이 먹으면 마음 맞는 친구 찾기 힘들어. 그래서 친구들과의 만남도 삶의 즐거움이야."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까마득한 선배까지 짚어주며 인생의 즐거움을 찾으라는 그의 충고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무뚝뚝하지만 귀에 쏙쏙 꽂히는 '직설화법' 때문이리라.
이런 윤여정식 화법은 올해 '시상식 시즌'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그리고 그 화법은 전 세계인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으며 한국에 대한 인식까지 바꿔놓고 있다.
그의 말 속에는 뼈 있는 메시지와 함께 시대정신도 전달되기 때문이다.
"캐나다인은 고상한 체하지 않아요(Canadian is not snobs)."
지난달 25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유니언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진행된 레드카펫 행사. 윤여정은 한 캐나다 방송과 인터뷰를 마치며 이 같은 끝인사를 건냈다. 그러자 이 방송사 리포터는 "우리는 당신을 사랑해요(We love you)"라며 윤여정의 사랑스러운 끝인사에 위트 있게 답했다.
이후 거행된 시상식에서 윤여정이 여우조연상 소감을 전할 때 경쟁자였던 배우 어맨다 사이프리드의 반응도 똑같았다. "그녀를 사랑해(I love her)."
윤여정 특유의 직설화법은 유독 서양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지난달 12일 제74회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BAFTA)에서 "무척 고상한 체하는(snobbish) 영국인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특히 의미가 있다"는 소감에 영국인들은 깜짝 놀랐다.
박장대소하며 놀라움을 감췄을지 몰라도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으리라. 시상자조차 허리 숙여 폭소를 날렸지만 깜짝 놀란 표정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이렇듯 윤여정으로 시작된 '스노비시'는 마치 유행어처럼 확산했다. 이를 퍼트린 건 다름 아닌 해외 언론이다. 특히 미국 언론들은 영국에 '한 방 먹인' 윤여정의 말을 유머러스하다고 포장하면서도, 한편으론 문화적 우월주의 성향을 가진 영국에 어퍼컷을 날린 그를 통해 대리만족하는 듯 보였다.
실제로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BAFTA에서의 수상 소감을 두고 뼈있는 보도를 했다. NYT는 "윤여정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남편 필립공 별세를 애도한 뒤 '깜짝 일격(the suprise kill)'에 들어갔다"며 '스노비시' 발언을 거론했다.
이어 "무뚝뚝하지만 사랑스러운 윤여정의 유쾌한 울림이었다"면서도 "시상식에 나타나 감히 투표자들의 얼굴을 (찌푸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윤여정은 그것을 매우 잘해냈다"고 평가했다.
이처럼 윤여정표 '스노비시'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일련의 '사건'이 됐다. 캐나다인 리포터가 윤여정의 장난 섞인 인사를 유쾌하게 받아들인 것도 '스노비시'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양인들에게 윤여정식 화끈한 직설화법이 통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1일 한국일보에 "프랑스의 르몽드나 르피가로 등 기사에서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을 그대로 노출한 사례도 있다"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영국에서 윤여정의 발언이 통한 건 '영국인의 자질은 자기 자신의 전통까지도 조롱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영국 특유의 유머와 위트 문화에서 비롯한 것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어 "미국에서도 소수자들과 워킹맘에 대한 위로, 경쟁보다 연대와 우정을 더 소중히 여긴다는 메시지가 가식 없이 전달돼 더 공감을 산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 교수는 미국에서 부는 '윤여정 현상'을 두고 "그토록 많은 미국 언론이 '미나리'에 출연한 스티븐 연이나 한예리가 아닌, 윤여정에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며 "미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는 윤여정의 언어야말로 그들이 잃어버린 '아메리칸 드림'의 요체였다고 본다"고 한 신문 칼럼을 통해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동양인이자 70대 할머니로서 편견을 깨는 화법이 서양인들을 휘어잡았다는 분석도 있다.
공문선 커뮤니케이션 클리닉원장은 "발표나 연설에서 뻔한 얘기가 나오지 않아 집중도가 높아지는 것을 '격차 효과'라고 하는데, 윤여정의 화법은 우리가 으레 기대하던 표현들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전 세계인들에게 신선함을 선사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더불어 공 원장은 "동양인에 대해 하위로 두는 서양에서 아시아의 70대 자그마한 할머니가 쉽고 맛깔스러운 영어 표현을 구사할 뿐만 아니라, '스노비시'나 '할리우드를 동경하지 않는다'는 등 다소 파격적 발언은 그들의 허를 찌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많은 유럽인들은 제 이름을 '여여'라고 하거나 '유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밤은 모두 용서해드리겠습니다."
농담처럼 넘겼지만 윤여정의 뼈 있는 소감은 쓰라린 여운을 남긴다. 이날 시상자들이 읊는 후보들의 이름이 꽤나 신경 쓰였을 시청자들이 분명히 있을 터다.
윤여정은 선견지명이 있었다. 최근 할리우드는 그 어느 때보다 올바른 이름을 얻는 것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인종·정체성·문화코드 등이 뒤흔들리는 문제가 야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일하는 환경 변화가 한몫했다.
넷플릭스에서 방영되는 쇼 '패트리엇 액트(Patriot Act)'의 진행자 하산 미나즈도 이런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인도 출신 무슬림인 그는 얼마 전 미국의 유명 토크쇼 '엘렌 드제너러스 쇼'에 출연해 이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재확인시켰다.
미나즈는 "배우 앤셀 엘고트의 이름을 발음할 수 있다면, 내 이름도 발음할 수 있다"며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이들에게 수정을 요구했다. 당시 이 영상은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400만 건 이상 조회수를 올리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서양인들이 다른 인종, 특히 동양인들의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것은 "암묵적 차별의 형태"라는 분석도 나온다. 다른 인종의 이름을 틀리게 부르면서 고치지 않으려는 행동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고의적 오류"에 가깝다는 의미다.
미국에서 최초의 여성이자 아프리카·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 당선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는 윤여정의 소감과 결을 같이한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시안 자오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는 "많은 사람이 깨닫지 못하지만, 습관적으로 낯선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것은 암묵적인 차별의 한 형태"라고 지적했다.
자오 교수는 이러한 행태가 "'당신은 소수'라는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며 "당신은 이 환경에서 중요하지 않은데, 왜 내가 그것(이름 발음)을 배우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느냐는 의중이 깔려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행위가 당사자의 자존감을 낮출 수 있다고 경고한다. 마일스 더키 미국 미시간대 심리학 조교수는 "이름을 잘못 발음하는 것으로 인한 파급 효과는 당사자에게 자신이 덜 중요하고 가치가 낮다는 시그널을 보낸다"고 우려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용주들의 깊은 관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더키 조교수는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계속 잘못 발음하는 것을 보면 동료와 상사가 개입해 바로잡아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그곳에서 이름으로 피해 보는 직원들에게는 직장 내 구성원이 아니라는 노골적인 메시지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윤여정의 화법에는 잘난 척이 없어요. 아팠던 경험을 토대로 삶에 대해 희망을 주거든요." 20대 대학생 임경은(가명)씨는 윤여정의 오스카 시상식 장면을 N차 시청했다. tvN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으로 친근했던 배우의 활약에 눈물도 찔끔했다고.
손씨는 요새 윤여정이 출연했던 예전 토크쇼를 찾아보고 있다. 이미 유튜브에는 그의 명언이 담긴 영상들이 폭주하고, 이를 공유하는 사람들도 급증하고 있다. '힐링캠프' '현장토크쇼 택시' '고쇼' '무릎팍도사' 등 윤여정이 입담을 과시했던 TV 프로그램들의 클립 영상이 유튜브에선 상한가를 치고 있다.
이들 영상에는 윤여정이 삶을 바라보는 달관된 어록이 넘쳐난다. "세상은 서러움 그 자체고, 인생은 불공정 불공평이다. 그런데 그 서러움을 내가 극복해야 한다", "아쉽지 않고 아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나. 내 인생만 아쉬운 것 같지만 다 아프고 아쉽다" 등은 만만치 않은 세상에서 찢기고 할퀸 자국에 연고를 발라주는 듯하다.
특히 70대 배우가 전하는 인생의 쓴맛은 MZ 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에 출생한 세대)의 가슴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하다. 직장인 김성욱(가명·32)씨는 회사에서 상사들의 "라떼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훈계가 가장 듣기 싫다고 했다.
김씨는 "업무에 있어서 선배들의 조언은 언제나 감사하다"면서도 "하지만 잘난 척하며 가르치려 드는 발언은 피곤하기만 할 뿐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반면 윤여정식 화법에는 묘한 끌림이 작용하고 있다. 자신의 아픔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실수와 실패의 경험을 기꺼이 공개한다. 이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팁도 얻을 수 있다는 것.
공문선 원장은 "최근 기업 강연을 나가보면 굉장히 많이 요구받는 것 중 하나가 젊은 세대와의 소통 방법이다"라며 "기성 세대들은 요새 젊은 세대들과 대화하고 싶어도 그 방식을 몰라 헤매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윤여정처럼 '꼰대' 성향을 버리면 소통의 길이 열린다고 제시한다. 공 원장은 "젊은 친구들이 어른들의 경험이나 지식에 대해서 크게 거부감이 없고 오히려 그런 점을 배우고 싶어 하는 경향도 있다"면서 "'내가 왕년에 이렇게 했으니 너희들도 본받아라' 식의 표현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었던 시기에 성장했던 일화를 들려주는 방식이 통하는 시대"라고 조언했다.
또한 MZ 세대들은 에둘러 표현하는 소통 방식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윤여정식 직설화법이 이들 세대에 통했다는 분석이다.
공 원장은 "무한 경쟁 속에서 성장한 MZ 세대들은 직장 생활에서도 공정한 평가, 보상 등을 원하며 직접 목소리를 내고 있다"며 "이들은 굳이 자신의 생각을 돌려서 말하는 수고로움 대신 시간과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직설법으로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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