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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정은 '최중'이어서 원더풀이다

입력
2021.04.3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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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배우 윤여정이 지난 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프레스룸에서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EPA 연합뉴스

배우 윤여정이 지난 25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유니언 스테이션에서 열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뒤 프레스룸에서 트로피를 들고 활짝 웃고 있다. EPA 연합뉴스

“감독이 60대 배우 중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 캐스팅한 거야. 어부지리지.”

10여 년 전 만났던 윤여정은 무심하고 시크한 코미디언 같았다. 의도적으로 상대를 웃기려 머리를 짜내는 하수의 유머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가 블랙코미디 대사 같은 고수의 유머에 절로 ‘윤며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틀에 박힌 대답만 늘어놓거나 질문의 의도와 다른 답을 내놓는 배우들과 비교하면, 그와의 인터뷰는 신세계였다. 과녁 정중앙에 꽂히는 화살처럼 그의 대답은 질문자의 의도를 직선으로 꿰뚫었고, 심지어 ‘이렇게까지 솔직해도 될까’ 싶은 이야기도 아끼지 않았다.

윤여정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사물의 본질을 볼 줄 아는 예리한 유머 감각일 것이다. 실제로 그와 몇 마디만 나눠도 아주 예리하고 영민한 사람이란 걸 알 수 있다. 고 김기영 감독이 윤여정과 영화 ‘화녀’를 찍고 나서 “내 말을 이해한 유일한 배우”라고 했다는데 그 이유가 쉽게 짐작이 된다.

지적이고 똑똑한 배우로 유명한 그지만 이혼 후 미국에서 돌아와선 자신이 연기를 못한다고 생각해 자책하며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고 한다. 결혼 전만 해도 스타였던 배우가 조연도 아닌 단역을 마다하지 않고 출연했다는 점도 놀랍지만, 이를 계기로 ‘안녕하세요’ 같은 간단한 대사 한 줄마저 수십, 수백 번씩 연습하게 됐다는 점에서 감탄하게 된다.

윤여정은 자신을 ‘생계형 배우’라고 말한다. 스스로 예술가로 여기기보다 직업인이라 생각한다. 대본이 닳도록 외우고 또 외워서 현장에 와선 오차 없이 첫 테이크에 쏟아 붓고 간다고 한다. “빨리 가서 쉬고 싶어서”라지만 자신이 연기를 못해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걸 끔찍이도 싫어해서이기도 하다.

윤여정은 신들린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아니다. 그런 연기를 선호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그가 김혜자나 나문희처럼 절정의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라기보다 개성 강한 연기자라 여긴다. ‘국민엄마’ ‘국민할머니’ 같은 수식어가 그에게 잘 따라붙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TV드라마에선 상황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가 1,000만 흥행작 목록에는 없어도 유명 국제영화제 초청 명단에 많이 오른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윤여정은 수십 년 연기한 베테랑 연기자들 가운데서도 독특한 지점에 있다. 강렬한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 배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습관처럼 틀에 박힌 연기를 하는 배우는 더더욱 아니다. 오스카 수상 후 썼던 표현을 인용하자면, 그는 '최고'가 아닌 '최중'의 연기를 한다. 직장인처럼 묵묵하고 성실하게 연기하면서도 매번 전형적인 것과는 다른 걸 하려 했던 결과다. 그래서 그의 연기는 일부 한두 작품이 아닌 여러 작품이 모여야 진정한 예술이 된다.

치열한 경쟁 속을 뚫고 ‘수상’해야만 인정받는 세계에서 윤여정의 다소 급진적인 사회주의 발언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승자독식의 세계가 아닌 “다 같이 최중이 되는” 사회, 무지개처럼 여러 색이 공존하고 “서로를 끌어안고 이해하는” 사회. 왕년의 스타에서 단역배우로 추락했다가 ‘미나리’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시 일어선 윤여정은 남들이 최고라고 치켜세울 때도 스스로 중간으로 내려오며 주위를 둘러본다. 영화 대사처럼 윤여정은 정말이지, 원더풀이다.

고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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