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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 이래 가장 위협적인" 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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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요한 23세(1881~1963)는 1958년 취임하자마자 4세기 니케아공의회가 공식화한 '반유대주의'에 반기를 들었다. '예수를 배신한 민족'을 배척한 과거를 공개적으로 반성하고 사죄했고, 폄훼의 기도문을 고치게 했다. 주 프랑스 교황대사로 2차대전을 치르며 교황청 '중립' 입장에 반해 신분과 직위까지 이용해가며 유대인들을 피신시킨 그였다. 이듬해 교황은 "교회도 이제 환기를 좀 하자"며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65)'를 제안했다. 교리-전례 개혁과 타 종교와의 화해를 비롯한 가톨릭 '현대화(Aggiornamento)' 선언이었다. 이혼과 피임 등 일상의 과제에서부터 교황(청) 권한과 위상까지 산더미처럼 쌓인 '뜨거운 감자'들을 마주하기 위해 전세계 고위 사제들과 내로라하는 신학자들이 성베드로대성당에 집결했다. 2000년 교회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사건'이 그렇게 시작됐다.
62년, 만 34세 사제 겸 튀빙겐대 신학자 한스 큉(Hans Kung, 1928.3.19~2021.4.6)도 전문자문위원(Peritus)으로 위촉됐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교황청 그레고리안대학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한 뒤 54년 사제 서품을 받고 57년 파리 소르본대 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공의회 최연소 전문위원이자 교황청 개혁파가 가장 기대하고 보수파가 경계한 신학자 중 한 명이었다.
박사학위 논문서부터 큉은 파란의 중심에 섰다. 개신교 신학자 카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의 그리스도 중심신학과 '종교개혁' 5대 원칙(Five Solas) 중 하나인 '믿음을 통한 구원(Sola Fide)'이 16세기 트리엔트공의회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논문 요지였다. 2001년 저서 '가톨릭의 역사(The Catholic Church, 을유문화사)'에서 큉은 종교개혁과 교회 분열의 주된 책임을, '복음으로 돌아가자'는 개혁자들의 요구에 교회-교황-복음은 하나라며 교황(교회)에게 순종할 것을 고집한 교황(레오 10세)에게 물었다. 저 전투적 청년 신학자는 문제의 논문을 단행본(Karl Barth and Catholic Reflection)으로 출간한 데 이어 '공의회와 재통합(The Council and Reunion, 1960)' '교회의 구조(Structures of the Church, 62)' '살아있는 교회(The Living Church, 63)' 등 잇단 저서로 교회일치(ecumenism)의 신학적 지향과 바티칸 권위주의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공의회에서 그가 펼친 활약을 한 바티칸 전문가(Peter Hebblethwaite)는 "그만한 영향력을 발휘한 신학자는 다시 없을 것"이란 말로 요약했다. 큉은 카를 라너(1904~84), 에드바르트 스힐레벡스(1914~2009) 등 기라성같은 개혁 신학자들과 연대해 자신들이 제기한 개혁 의제 대부분을, 일부는 수정된 형태로나마 최종 문헌에 담는 성과를 이뤘다. 미사 언어가 마침내 라틴어 굴레에서 풀려났고, 공동 성서 번역도 가능해졌다. 성공회 및 동방정교회와 화해했고, 오랜 금서 목록이 폐기됐다. 공의회 이후 큉은 강의와 강연, 저술활동을 이어가며 동료 신학자들과 함께 65년 저널 '공의회(Concilium)'를 창간해 공의회 정신 확산에 매달렸다.
공의회 이후 14년 만인 1979년 12월, 큉은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신앙교리성(CDF)에 의해 튀빙겐대 신학교수 자격을 박탈당했다. 교황청의 가장 오래된 심의기구이자 중세 종교재판소의 후신 격인 CDF는 "(큉이) 가톨릭 신앙과 정통의 진리로부터 멀어졌다"고 선언했다. 주된 근거는 1차공의회(1869~70)가 반포한 '교황 무오류성(Papal Infallibility)' 즉 '교황의 공식 지침은 신앙적 도덕적 교리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입장을 복음과 역사를 근거로 논박한 그의 70년 책 '무류성에 대한 의문(Infallible? An Enquiry)'이었다.
CDF는 교황(청) 권력과 권위의 핵심 논거를 반박한 저 책이 출간되자마자 그를 옹호하는 일체 행위를 금지하고 신앙 조사에 착수했다. 300여 명의 가톨릭-개신교 신학자들이 그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교황청은 히틀러 집권 직후인 1933년 나치와 맺은 상호 특권 인정 정교협약(Concordatum)에 따른 독일 내 신학교수 임면권 행사를 강행했다. 튀빙겐대 신학생 1,000여 명이 촛불 항의시위를 벌였다. 큉은 튀빙겐대 이사회의 배려로 대학부설 교회일치신학연구소장 직을 유지하며 교회 비판과 개혁 요구의 강도를 높였다.
가톨릭 보수진영으로부터 '마틴 루터 이래 가장 위협적 인물' 심지어 '적그리스도(Antichrist)'라 불리기도 했다는 신부 겸 신학자 한스 큉이 별세했다. 향년 93세.
스위스는 바티칸 근위병의 나라답게 가톨릭 성향이 강하지만, 종교개혁가 츠빙글리의 영향으로 개혁적 전통 역시 강한 나라다. 그건 루터의 조국 독일도 마찬가지여서, 성사론이나 교회론 발전에 기여한 개신교적 개혁성향의 튀빙겐 학파가 대표적이다. 저 경향은 로마-이탈리아 중심 바티칸 체제에 대한 반감과도 무관하지 않을 텐데, 62년 공의회 당시 독일 주교는 26명인 반면 이탈리아 주교는 무려 290명이었다. 공의회에서도 비이탈리아권 사제들, 특히 독일어권과 성공회 전통의 영어권 주교들이 큉의 진영에 섰고, 그 형세를 두고 "라인 강물이 티베르 강(로마를 관통하는 강)으로 흘러들고 있다"는 말이 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열세였고, 63년 요한 23세 교황이 숨지면서 가장 든든한 뒷배를 잃었다. 공의회를 마무리한 후임 교황 바오로 6세(63~78년 재임)는 "(큉의) 충성된 반대를 너그럽게 허용"(위 책)하긴 했지만 68년 회칙 '인간 생명(Humane Vitae)'으로 인위적 피임 금지 원칙을 재확인한 이였고, 단 33일 재임한 요한 바오로 1세에 이어 만 27년(1978~2005) 재위한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2005~13년 재임)은 표나는 보수파였다. 큉은 저 거센 역류를 '공의회 정신의 배반'이라 주장했다.
큉에 대한 견제는 공의회 중에도 거셌다. 63년 방미해서 케네디 당시 대통령을 만난 그였지만, 미국 주교들의 반대로 워싱턴D.C 아메리카가톨릭대학 연단에는 서지 못했다. 훗날 CDF 장관을 지낸 오타비아니(Ottaviani) 추기경은 공의회 직후 큉을 공개적으로 경고했고, 그를 아꼈던 바오로 6세는 교황청 보직을 줄 테니 책은 그만 쓰라고 회유했다.
물론 그는 거부했다. 강연을 엮어 67년 책('The Church')을 출간하려 하자 교황청은 검열 전까지 출간-번역을 금지했지만, 그는 영국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Michael Ramsey)에게 헌정한다는 문구까지 넣어 출간을 강행, 68년 CDF에 소환됐다. 조사 청문회 와중에 출간한 게 '무류성에 대한 의문'이었다.
그는 '교황 무류성'뿐 아니라 성직자 독신 수칙과 사제직 여성 배제가 예수나 복음과 무관하게 종교권력이 특권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만든 폐습이라 주장했고, 주교 및 평신도 권한 강화와 피임-낙태-이혼을 옹호했다. 동성애자 차별에 일관되게 반대했고, 말년에는 안락사 권리를 옹호했다. 그는 저 입장들을 윤리가 아니라 신학, 즉 예수의 행적과 복음에 근거해 주장했다. "가톨릭 신학에 의문을 제기할 수 없다면 왜 신학을 연구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던 그는 68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선 교황청과 공산주의를 대비하며 "둘다 절대주의 중앙집권주의 전체주의를 따르는, 한마디로 자유의 적"이라고도 했다. 바티칸이 큉을 파문하지 않은 건 그의 영향력과 후유증을 우려한 탓이었겠지만, 어쨌건 그는 주류-정통 가톨릭 진영의 '왕따(pariah)'였다.
하지만 그는 평생 독신을 고수하며 '왜 나는 여전히 크리스천인가(Why I Am Still a Christian,1987)' 등의 저서까지 쓰면서 자신의 신앙에 충실했고, 그럼으로써 윤리-가치와 충돌하는 교회의 지침 때문에 갈등해온 수많은 신자들에게 신앙을 포기하지 않을 근거를 제공했다고, 한 영국 작가(Robert Nowell)는 그의 전기에 썼다.
큉과 훗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인 요제프 라칭거(1927.4.16~)는 60년대 둘도 없는 개혁파 동지였다. 상대적으로 한미한 본대학서 강의하던 라칭거를 63년 뮌스터대로 이끈 게 큉이었고, 2차공의회에서 큉의 가장 든든한 우군이 라칭거였다.
하지만 둘은 68년 혁명의 혼란기를 겪으며 빠르게 멀어졌다. 엄밀히 말하면 라칭거가, '강의실에까지 난입하는 좌파 학생들의 폭력성에 환멸'을 느껴 급격히 보수화했다. 79년 큉이 교수직을 박탈당할 때도 라칭거는 교황 편에 섰고, 주교-추기경을 거쳐 바오로 2세의 CDF 장관(1981~2005)으로 재직하며 개혁파 사제 및 단체들의 활동을 검열하고 심판하는 데 앞장섰다. 라칭거는 중세 종교재판을 주도한 '도미니코(domini+canis, 주님의 개) 수도회'에 빗댄 '신의 로트와일러(God's Rottweiler)'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였지만, 그의 추종자들은 저 별명을 자랑스러워했다. 큉은 라칭거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나오는 '대심문관'에 비유했다.
2005년 9월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옛 친구인 큉을 교황 여름별장(Castel Gandolfo)에 초대, 교황청 공식발표에 따르면 "매우 우호적인" 대화를 나눴다. 접점을 찾기 힘든 이슈들은 배제하고, 큉이 90년대부터 열정적으로 펼쳐온 '보편윤리(Weltethos)' 및 신앙과 자연과학의 접점에 대한 논의에만 국한한 대화였다. 큉은 "전임자(바오로 2세)에게 25년간 수십 차례 면담을 청했지만 모두 거절 당한" 사연을 언급하며 "교황이 나와 대화한 것 자체가 희망적 신호"라고 말했다.
종교재판은 심리적 고문의 형태로,
숱한 강압적 지침의 형태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한스 큉 'Christianity: Essence, History, Future'
하지만 2012년 CDF는 미국 수녀 5만7,0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단체 '여성종교지도자회의(LCWR)'에 특별감찰관을 파견, 신앙 조사에 착수했다. 동성애자 결혼, 낙태, 여성 사제 서임 등 이슈를 두고 교황청에 떨떠름한 입장을 보여왔다는 게 LCWR의 '혐의'였다. 큉은 "교황이 원하는 것은 오직 복종"이라며 "베네딕토 교황은 교황권에 대한 중세적 사상에 젖어 있다"고 비난했다. 미국 주교들을 비롯한 교계는 물론 침묵했다. 큉은 "한 명의 신부가 문제를 제기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10명이 일어서면 심각한 위협이 되고, 50명이 뭉치면 무적이 된다"는 말로 사제들의 침묵을 비판했다. CDF와 LCWR은 교황이 바뀐 2015년 공동보고서를 내고 '합당한 신학자들'이 LCWR의 모든 출판물을 사전에 검토하고, 모든 집회 주제와 연사들을 "사려 깊게 식별하는 자세"로 선정하는 데 합의했다고 밝혔다.
그 무렵 출간한 책 '가톨릭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을까(Can the Catholic Church Be saved?)'에서 큉은 "종교재판은 심리적 고문의 형태로, 숱한 강압적 지침의 형태로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썼다.
90년대부터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 타 종교 경전을 연구하며 가톨릭 신학과 사회윤리적 공통점을 찾고 대화를 모색해온 그는 한 독일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1996년 '세계윤리재단(Stiftung Weltethos)'을 설립해 이끌었다. 95년 책 'Christianity: Essence, History, Future'에 그는 "종교간 평화 없이 국가간 평화는 없고, 종교간 대화 없이 종교간 평화도 없다. 그리고 종교들의 토대에 대한 연구 없이는 종교간 대화도 없다"고 썼다. 그렇게 그는 종교-철학의 해묵은 난제 중 하나인 종교와 윤리의 관계성(우위성)과 차별성 자체를 우회하거나 초월하고자 했다.
큉은 자신도 윌리엄 텔(스위스 설화 속 의적)의 후예라며 "스위스 농부는 연방평의회 위원(대통령이 선출되는 7인 행정기구)과 악수를 할 때면 고개를 오히려 치켜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교황청 권력자들을 대할 때 그의 태도가 그러했고, 그 탓에 갈등을 오히려 악화한 면도 있었다. 그도 자신이 맞선 '교조' 못지않게 옳다고 믿는 바에 완고해서, "큉은 교황을 하라고 해도 못할 것이다. 왜? 자신의 무오류성을 인정할 수 없어서"란 농담을 들을 정도였다.
그는 전례를 개혁하고 성가를 표준화(그레고리오 성가)해 '위대한(magnus)'이란 공식 칭호를 받은 '대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년 지위)를 존경했고, 자신의 강연을 대교황의 말씀-"만일 추문이 진실이라면, 진실을 버리기보다 추문을 따르는 게 옳다"-으로 맺곤 했다고 한다. 파킨슨병을 앓으며 보고 쓰는 능력을 잃은 말년까지 그가 그렇게 살았다. 그는 '진실'을 위해 스스로 '추문'이 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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