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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부터 삼성까지, 세계적 미술컬렉션엔 늘 유력가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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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주요 흐름과 이슈들을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 있는(deep) 지식과 폭넓은(wide) 시각으로 분석하는 심층 리포트입니다
고 이건희 회장이 소유했던 삼성가의 미술품 컬렉션이 큰 화제이다. 국보급 문화재뿐만 아니라 유명 서양화가들의 작품을 포함한 대규모의 미술품이 유족들에 의해 국가에 기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기증품이 모두 이건희 회장의 것인지 부인인 홍라희 여사와 선대인 이병철 회장의 수집품까지 포함하고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삼성가의 이번 선물은 2만3,000여 점이라는 압도적인 양이나, 모네의 '수련' 등 국내에서는 전혀 접할 수 없었던 인상주의 걸작을 포함한다는 측면에서 건국 이래 최대이자 최고의 기증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관련 작품 연구를 꾸준히 진행한다면 국내 미술사 연구의 수준과 지평도 크게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미술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유력 가문의 미술품 수집과 기증은 오랜 역사를 가진다. 다만 한국에서 그런 일이 별로 없었을 뿐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유럽의 유서 깊은 국립박물관이나 미술관 상당수는 해당 국가 왕가의 수집품을 기반으로 한다. 미술 후원과 수집의 대명사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메디치(Medici) 가문이 대표적이다.
15세기 피렌체에서 금융업을 바탕으로 급성장한 메디치 가문은 1569년 코지모 메디치가 토스카나 대공으로 서임됨에 따라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 지역의 명실상부한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다. 오늘날 우피치 미술관으로 알려진 건축물도 원래 토스카나 대공국의 정부청사로 쓰기 위해 16세기 후반 건립했고 건물의 일부는 미술관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상속과 구매 등을 통해 메디치가의 미술품 컬렉션은 더욱 확대되어, 18세기에 이르면 메디치 컬렉션은 전 유럽 미술애호가들에게 이미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이는 이탈리아까지 갈 수 없었던 영국의 샤롯 왕비가 독일 출신의 영국 화가 조파니로 하여금 우피치 미술관 내에서도 최고의 걸작들을 모아놓은 전시실로 유명한 트리뷰나(Tribuna)를 그려오도록 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러나 메디치 컬렉션은 1737년 큰 위기를 맞는다. 후사가 없던 토스카나 대공국의 마지막 군주 잔 가스토네 데 메디치가 사망하면서 메디치 가문의 남성 직계라인이 끊어졌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프랑스 출신으로 후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프란츠 1세의 손에 넘어갔다.
위기에 처한 메디치 컬렉션을 지켜낸 이는 잔 가스토네 메디치의 누나였던 안나 마리아 루이자이다. 독일의 팔라틴 선제후였던 빌헬름 2세와 결혼했던 안나 마리아는 동생이 죽자 우피치 미술관을 비롯한 메디치 가문이 남긴 문화적 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프란츠 1세와 협상을 통해 우피치 미술관을 국가에 귀속시켰다. 안나 마리아 또한 자식이 없어 그녀의 사후 메디치 가문은 영원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안나 마리아 루이자 덕분에 여러 세대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은 온전히 남아 오늘날까지 전 세계 미술 애호가들에게 메디치 가문의 이름을 각인시키고 있다.
유럽에서 유력 가문이 여러 세대에 걸쳐 수집한 미술품을 국가에 기증하는 경우는 왕가뿐만 아니라 귀족 가문에도 해당되는데, 월러스 컬렉션(Wallace Collection)은 그 좋은 예이다. 이 컬렉션은 영국의 허트포드 후작 가문이 5대에 걸쳐 수집한 결과물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4대 허트포드 후작과 그의 아들인 리처드 월러스경은 생애 대부분을 프랑스에 거주하며 18세기 프랑스 미술품 수집에 열중했고 그 결과 월러스 컬렉션은 프랑스 본토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 수준의 18세기 프랑스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다.
막대한 토지를 물려받아 19세기 유럽 최고의 부자 중 한 명이었던 4대 허트포드 후작은 “내가 죽을 때 평생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겠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정머리 없는 괴짜였으나, 프랑스의 저명한 미술비평가 토레가 “의심할 여지 없이 유럽 최대의 수집가는 허트포드경”이라고 평했을 만큼 평생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렸다.
미혼으로 삶을 마감했던 허트포드 후작은 젊은 시절 유부녀와의 불륜으로 얻은 월러스경을 개인 비서로 두고 함께 미술품을 수집했고, 1870년 후작이 사망하자 월러스경은 프랑스인 아내와 함께 런던으로 이주했다. 후작의 미술품 컬렉션과 영지 일부를 유산으로 물려 받은 월러스경은 영국 이주 후에도 대규모로 갑옷, 중세 및 르네상스 회화 등을 수집했으나, 월러스 컬렉션을 국가에 기증한 이는 월러스경이 아닌 그의 노동계급 출신 프랑스인 아내인 쥴리 아멜리이다. 1890년 월러스경이 사망하자 그녀는 월러스 컬렉션을 포함한 유산을 상속받았고 손자와 손녀들이 있었음에도 1897년 자신의 사망과 함께 컬렉션을 국가에 유증했다. 유증의 조건으로 컬렉션의 매매는 물론 대여조차 금지한 월러스 부인의 혜안 덕택에 18세기 프랑스 미술 애호가라면 지금도 파리가 아닌 런던으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유럽인들의 미술품 수집 열풍은 19세기 후반 미국으로 번진다. 자본주의가 급성장하면서 급격히 부를 축적한 미국의 자본가 및 금융가들 중 일부는 미술품 수집에 눈을 돌렸고 특히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많은 귀족 가문이 몰락하면서 이들의 컬렉션 중 상당수가 미국의 신흥 부호들의 손에 넘어갔다. 이 중 특히 멜론(Mellon) 가문은 아버지와 자식 2대에 걸쳐 미술품을 수집하고 이를 다시 국가나 공공기관에 대규모로 기증해 후대에 귀감이 된다.
금융업을 기반으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중 하나로 성장한 멜론가의 앤드루 멜론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할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1890년대부터는 미술품 수집에도 열정을 쏟았다. 특히 그가 1931년 구 소련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으로부터 116만 달러에 사들인 라파엘로의 '알바 마돈나'는 당시까지 거래된 단일 미술품 중 최고가였다. 이어 1936년 앤드루 멜론은 수도 워싱턴에 국립 미술관 설립을 제안하고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과 미술관 건립 비용을 국가에 기부했다. 즉, 한 개인이 사재를 털어 국립미술관을 설립한 것이다.
앤드루 멜론의 미술품 사랑과 통 큰 기부는 자식들인 엘사와 폴에게도 전승되었다. 1969년 사망 시 엘사는 153점에 달하는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과 함께 거금을 아버지가 설립한 국립미술관에 기부했고, 폴 또한 1,000점이 넘는 프랑스와 미국 미술 수집품을 생전에 국립미술관에 기증했다. 더불어 폴 멜론은 영국 미술에도 큰 관심을 갖고 많은 작품을 수집, 모교인 예일대와 자신이 거주하던 버지니아주의 버지니아 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미술 후원과 수집의 역사가 오래된 서구에서는 그만큼 기증의 역사도 길다. 국내에도 간송 전형필 선생의 수집품을 바탕으로 한 간송미술관이 설립되어 1971년부터 유물이 일반 대중에게 공개되고 있으나 아쉽게도 소유권자는 아직 국가가 아니다. 이건희 컬렉션 기증과, 그에 앞선 김정희의 '세한도'를 중심으로 한 손세기-손창근 부자(父子)의 컬렉션 기증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에 자랑할 만한 기증의 역사를 쓸 수 있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전동호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근세 서양미술사 전문가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하고 영국 에섹스대 석사를 거쳐 맨체스터대에서 '귀족가문과 컬렉션'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18~19세기 서양미술사 및 동서양 미술교류를 심층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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