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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 목숨 앗아간 자리…"집값" 앞에 추모는 혐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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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서초구 서초동 1686-3’
“’참사 현장에 자그마한 추모비 하나라도 만들자’는 게 유족들 마지막 바람이었죠. 백화점 무너진 땅 팔아 유족들 보상금 줘야 하는데 그런 ‘혐오 시설’이 들어오면 그 땅을 누가 사겠냐는 게 시 당국 입장이었어요. 지금 그 자리요? 700세대짜리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죠. 그 흔한 비석 하나 없어요.”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유가족 김문수(59)씨)
1995년 6월 29일, 지상 5층 지하 4층 규모의 대형백화점이 20초 만에 무너져 내렸던 그 자리엔 37층짜리 고층건물이 버티고 있다. 500여 명이 죽고, 900여 명이 다친 과거의 그날은 말끔히 지워져 있다.
#2. ‘서울 용산구 한강로3가 63-70’
“참사 현장에 나무 다섯 그루를 심으려고 했어요. 경찰의 무리한 진압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철거민 다섯 분을 상징하는 거였죠. 추모공간을 마련하자고 했더니, 재개발 조합이 맹렬하게 반대를 했죠. ‘집값 떨어진다’, ‘매년 와서 데모할 것 아니냐’고요. 결국 현장엔 아무것도 안 남았습니다.” (용산참사진상규명위원회 이원호 사무국장)
2009년 1월 20일, 재개발 반대 농성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5명의 철거민이 사망한 이곳엔 43층짜리 주상복합 빌딩이 세워졌다. 최고가가 60억을 호가하는 초호화 아파트다. 국가 폭력이 시민을 죽인 과거의 그날 역시 말끔히 지워져 있다.
대한민국의 참사현장은 천연덕스럽다. 비극의 현장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표정을 바꾸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0년 남짓.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잠시뿐, 모두가 있는 힘껏 ‘그날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혈안이 된다.
추모 시설은 언제나 ‘혐오의 도마’에 오른다. ‘납골당은 너희 집 안방에나 만들라’는 비아냥이, ‘집값 떨어지면 책임질 거냐’는 힐난이 빗발친다. 날선 혐오를 피해 산세 깊은 외곽에, 도심 공원 한구석에 처박힌다. 참사 현장과 한참 동떨어진 곳에 비석 하나 세우고, 해마다 추모식 열어주면 그뿐. 그렇게 ‘집값’은 사수됐을지 몰라도 ‘기억하겠다는 다짐’은 영영 사라졌다.
2021년은 삼풍백화점 26주기, 대구지하철 참사 18주기, 용산참사 12주기, 그리고 세월호 참사 7주기가 되는 해다. 무엇 하나 제대로 진상이 규명된 바 없는 이 참사들은 과연 ‘잘 기억되고, 잘 기려지고’ 있을까. 한국일보 뷰엔(view&)팀이 참사 현장의 어제와 오늘을 둘러봤다.
2009년 용산 참사 당시, 희생자들의 장례를 치르기까지 장장 1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추모 시설 문제를 두고 재개발 조합과 희생자 가족들이 팽팽하게 대립했기 때문이다. ‘참사가 일어난 현장에 작게라도 추모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간소한 요구는 완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사람 죽어 간 곳인 걸 알리면, 누가 큰돈 내고 아파트 사고 싶겠냐’는 게 이유였다. 부동산 광풍 시대에 ‘집값’은 인간의 도리보다 우선하는 가치였다.
어렵사리 ‘추모 수목’을 심기 위한 작은 공간을 마련하는 것으로 합의가 됐지만, 금세 없던 일로 돌아갔다. 당장 첫 삽을 뜰 기세로 원주민들을 내쫓은 게 무색하게도 용산 참사 부지는 7년간 공터로 방치됐다. 재개발 인허가 과정에서 일어난 불법 행위들이 뒤늦게 밝혀지고, 곧이어 긴 부동산 침체기가 닥친 탓이다. 황량한 공터 위에 시민들이 직접 만들어 붙인 ‘추모 현수막’만이 나부꼈다.
‘기억의 의지’는 이 현수막에서 그치고 말았다. 부지가 방치되는 7년 사이 시공사가 바뀌며, 추모 수목을 조성하는 계획은 아예 무산됐다. “그 대신 다른 공공 건물에 ‘용산 도시기억 전시관’을 만드는 쪽으로 합의가 되긴 했어요. 하지만 전시 내용을 만드는 과정에서 ‘화재’, ‘철거민의 죽음’ 등 참사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단어들은 대부분 배제됐죠.” (이원호 사무국장) ‘이곳에서 누군가 희생됐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게 조합 측이 내민 원칙이었다.
결과적으로 참사 현장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매매가가 평당 6,000만 원을 훌쩍 넘는 고가의 아파트만 유유히 서 있다. 욕망이 사람을 죽인 땅 위에, 욕망으로 지은 성채가 올라간 셈이다. 건물 입구 앞에 약 50㎡가량의 잔디밭이 조성됐지만 희생자를 기리는 수목은 뿌리내리지 못했다. ‘보도 블록 색깔을 달리해 이곳이 참사 현장임을 알리는 작은 표식을 남기자’는 소박한 제안마저도 ‘합의 사항 위반’이라며 끝내 거절당했다.
용산 이전에도 참사는 반복돼 왔으나 매번 까마득하게 잊혔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당시, 유가족들은 참사 현장에 추모공간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다. 참사가 일어난 날을 ‘국가 안전의 날’로 지정하자는 제안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뒤늦게 만든 위령탑은 엉뚱하게도 참사 현장에서 6km 이상 떨어져 있는 ‘양재 시민의 숲’ 안에 세워졌다. “거기 온갖 참사 추모 위령탑이 다 모여 있거든요. 그마저도 공원 남쪽 자락 구석에 있어서 찾기도 힘들죠. 유족들 요구에 못 이겨 구색 맞춰 하나 세우고 치워버린 꼴이죠.” (삼풍 백화점 유가족 김문수(59)씨)
대구 지하철참사 희생자 유족들은 사고 이후 18년이 지나도록 ‘추모’라는 명칭조차 쓰지 못하고 있다. 사고 현장으로부터 16km 거리인 팔공산에 겨우 자리 잡은 추모 공간에는 ‘추모공원’ 대신 ‘대구 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근 주민들의 거센 반발 때문이었다. 18주기를 맞이한 올해 2월, 이제라도 참사를 기리기 위해 ‘2·18 기념공원’이란 이름을 붙이자는 안이 제시됐으나, 이 역시 지역 상인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혔다. 현재 대구 중앙로역 지하 2층엔 참사 현장을 보존한 '기억의 공간'이 작게 마련돼 있다. 참사 이후 12년 만에 만들어진 공간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세월호 유가족들이 ‘참고할 만한 전례’가 없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전국을 샅샅이 뒤져도 소득이 없자 독일 베를린까지 답사했다. “우리나라 추모시설들은 전부 산 속에 파묻혀 있어요. 유가족들조차 한번 가려면 마음을 크게 먹어야 할 정도로 외진 곳이죠. 베를린은 달랐어요. 온 도시가 ‘기억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더군요. 도시 한복판에 축구장 3개 크기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자리하고 있었어요. 추모 비석에 걸터앉아 책을 읽거나 호젓하게 산책하는 시민들이 많았죠. 일상의 공간에 ‘기억’이 그대로 녹아 있는 모습이었어요. 삶과 죽음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라 그곳에 함께 있었죠.” (정부자 세월호유가족대책위 추모부서장, 단원고 2학년 고 신호성군 어머니)
경기 안산 초지동 ‘화랑유원지’에 조성될 세월호 참사 추모공간 ‘생명안전공원’은 2022년 첫 삽을 뜰 예정이다. 앞서 지역 주민들은 거세게 반발했다. ‘안산 시민이 다같이 이용하는 유원지를 납골당으로 둔갑시키려 한다’며 시위까지 불사했다. 유가족들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어 가면서까지 시민들을 설득하며 화랑유원지를 고집한 이유는 하나다.
“다른 참사들처럼 잊히고 싶지 않아서예요. 여긴 안산 시민들이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이거든요.” 단원고가 한눈에 보이는 화랑유원지는 희생된 아이들이 살았던 와동, 선부동, 고잔동에 안겨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소풍가고 자전거를 배우며 뛰어놀던 곳이기도 하다. “저희는 넓고 번드르르한 그런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눈 돌리면 볼 수 있는 곳’을 원했어요. 곁에 있어야 잊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2만8,0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9·11테러 추모 공간은 미국 시민의 ‘곁’에 만들어졌다. 뉴욕 맨해튼은 지구상에서 가장 비싼 땅값을 자랑하지만 참사 현장인 세계무역센터 자리에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했다. 이곳은 뉴욕 시민들의 발길이 가장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다.
쌍둥이 빌딩이 있던 두 개의 정사각형 자리는 폭포가 흐르는 ‘빈 공간(void)’으로 남겨 뒀다. 약 3000명에 달하는 희생자의 이름이 일일이 각인되어 있다. 이 폭포의 이름은 ‘부재의 반추(Reflecting Absence)’다. 희생자들의 ‘부재’를 선명하게 소생하는 광막하고도 숙연한 풍경이다. 고층건물로 빽빽한 우리나라의 참사 현장과 명확히 대비된다. 사건의 흔적이 말끔하게 휘발된 공간에선 '부재를 반추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참사를 경험했던 이들은 하나같이 ‘세월호는 달라야 한다’고 말했다.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 동생을 잃은 김문수씨는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와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보며 답답한 가슴을 쳤다. “그때 우리가 양보하지 않고 더 열심히 싸워 기억공간을 만들었다면 이런 사고가 반복되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어쩐지 빚을 진 기분이에요.”
용산참사 진상규명위 이원호 사무국장 역시 이렇게 말했다. “지금도 용산 유가족들은 신용산역 앞을 지나가질 못해요. 오직 상처만이 남은, 영영 찾고 싶지 않는 곳이 된 거죠. 세월호는 용산과 달라야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역시 ‘이번엔 달라야 한다’고 다짐한다. 유가족들이 추모공원에 원하는 건 하나다. “차가운 바다에서 외롭게 간 아이들이 외롭지 않도록 언제나 사람들이 붐비는 공간이 되는 거요. 1년에 딱 한번 ‘추모식’ 하러 찾는 공간이 아닌 ‘일상의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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