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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시즌 지배" 윤여정, 102년 한국 영화 역사 새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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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표정이었다. 무대를 올라갈 때 발이 턱에 살짝 걸렸다. 어느 때보다 긴장한 듯했다. 금빛트로피를 손에 쥔 후 소감을 말할 때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첫마디부터 특유의 뼈있는 농담을 던졌다. 경쟁 후보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오스카 후보에 8번 지명됐으나 무관 행진을 이어가게 된 동갑내기 미국 배우 글렌 클로스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또 다른 경쟁자 어맨다 사이프리드는 옆 사람에게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나, 저 여자 좋아(I Love Her).” 무대를 내려올 때는 할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가 손을 잡아주며 안내했다. 한국 배우 윤여정(74)을 주인공으로 한, 초현실적인, 그러나 현실에서 일어난 장면이었다.
윤여정이 역사를 새로 썼다. 102년 한국 영화 역사와 93년 오스카 역사가 바뀌었다. 윤여정은 25일 오전(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제93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미나리’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한국 배우로는 최초다. 아시아계 배우로는 1958년 일본계 미국인 우메키 미요시(사요나라) 이후 두 번째로 63년 만이다.
한국 영화계는 지난해 ‘기생충’이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을 수상하며 4관왕에 오른 데 이어 2년 연속 오스카 트로피를 가져오게 됐다. 미국 밖 나라, 특히 아시아 국가는 그동안 경험하기 힘들었던 모습들이다. 윤여정은 미국 아칸소주에 정착하려는 한인 가정을 그린 재미동포 2세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에서 딸 가족을 돕기 위해 한국에서 온 할머니 순자를 연기했다.
예견된 이변이었다. ‘미나리’는 작품상과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음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여우조연상 수상이 가장 유력했다. 미국 연예전문 매체 할리우드리포터가 지난 21일 시상식 결과 예측 기사에서 “멈출 수 없는 동력(Unstoppable Momentum)”이라 표현할 정도로 윤여정의 기세가 좋았다. ‘오스카의 바로미터’로 통하는 미국배우조합(SAG)상과 영국 아카데미영화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으며 경쟁자들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윤여정은 오스카에 앞서 영미권에서 배우상만 38개를 받았다. 할리우드리포터는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끝난 후 “윤여정은 올해 시상식 시즌을 지배해 왔다”고 평가했다.
출발부터 오스카를 겨냥하진 않았다. 오스카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미나리’는 미국 독립영화다. 제작비는 200만 달러로 알려졌다. 미국에선 저예산 중 저예산에 해당한다. 윤여정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재미동포에게 도움을 주자”는 마음에 출연했다.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이며 기적이 시작됐다. ‘미나리’는 미국 극영화 부문 심사위원대상과 관객상을 받았다. 평단이 주목했고, 할리우드가 관심을 드러냈다. 오스카 가는 길이 열렸다.
윤여정의 여우조연상 수상은 의미가 깊다. 한국 배우 최초라는 수식 이상이다. 한국을 넘어 세계 영화인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새 의지를 다지게 할 계기가 될 전망이다. 심재명 명필름 대표는 “미국이라는 땅에서 아시아계 여성 배우로서 이 상을 수상했다는 점은 인종 간 격차 문제, 동서양을 넘나드는 글로벌한 가치관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는 역사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70대 중반의 아시아 여성이라는 상대적 불리를 극복하며 93년 아카데미는 물론 세계 영화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며 “역사적 의의는 ‘기생충’을 능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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