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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따위”라고 말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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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짬내서 영화 한 편 보고 싶지 않으신가요. 이왕이면 세상사를 좀 더 넓은 눈으로 보게 해주거나 사회 흐름을 콕 집어주는 영화 말이에요. ‘라제기의 영화로운’은 의미 있는 영화 관람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 중 탈무드의 글귀
지난해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으로 제92회 아카데미영화상 4관왕에 올랐을 때입니다. 공식 기자회견에서 자신에게 영향을 준 일본 감독으로 구로사와 기요시를 꼽았습니다. 공포영화와 스릴러로 일본사회의 단면을 들춰 온 감독입니다. 그의 최신작은 지난달 국내 개봉한 ‘스파이의 아내’입니다. 구로사와 감독이 첫 도전한 시대극입니다. 전쟁범죄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사회에 통렬한 펀치를 날리는 영화입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해양 방류 결정 등을 두고 한국과 또다시 첨예한 감정싸움을 하고 있는 일본이 뜨끔하게 여길 작품입니다.
영화의 주요 시공간은 1940년 일본 고베입니다. 주인공은 유사쿠(다카하시 잇세이)와 사토코(아오이 유우) 부부입니다. 유사쿠는 부유한 무역상입니다. 영국과 미국 등을 거래처로 두고 있습니다. 개방적인 유사쿠는 일본사회에 불어 닥친 군국주의 바람이 영 마땅치 않습니다. 국민복 착용령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양복을 입고 생활합니다. 사토코 역시 남편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지녔습니다. 사토코의 소꿉친구이자 고베 헌병대장인 타이지(히가시데 마사히로)는 이들 부부를 예의주시합니다. 사토코에게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이 집 분들은 모두 서구 복장이네요… 당신들에게 당연한 일상이 체제 비판입니다.”
유사쿠는 조카와 함께 사업차 만주국에 갔다가 참혹한 현실과 마주합니다. 만주국은 정부 선전과 달리 ‘왕도낙토(인덕으로 다스려지는 극락 같은 땅)’가 아니었습니다. 유사쿠는 관동군이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세균무기를 실험하고, 전쟁포로에게 생체실험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생체실험 노트와 영상을 확보해 이를 미국에 알리려고 합니다. 격노한 미국이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들어 일본제국주의를 끝장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합니다.
사토코는 그런 남편을 “매국노”라고 말하며 말립니다. 유사쿠는 이렇게 일갈합니다. “난 코스모폴리탄이야. 내가 충성을 서약한 건 국가가 아니야. 만국공통의 정의야. 불의를 묵과할 수 없어. 불의에 기반한 행복에 만족해?” 유사쿠의 저 말은 사토코를 향한 것이지만, 전쟁범죄에 둔감한 일본인들에게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명시하지 않지만 731부대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731부대는 페스트균을 전쟁포로에게 주사해 진행 상태를 살피는 등 악랄한 생체실험을 했습니다. 중국과 러시아인, 한국인, 몽골인 등 적어도 3,000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산됩니다. 세계에 널리 알려진 악행임에도 일본 정부나 관계자가 이를 인정하고 제대로 사과한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모습과 닮았습니다. ‘스파이의 아내’가 731부대를 소재로 삼은 이유는 명확합니다. 범죄 사실을 직시하고 이에 대해 사과하고 반성하라는 것이지요.
헌병대장 타이지는 전쟁범죄를 부인하는 일본 정부와 우익을 대변합니다. 타이지의 책상 뒤편에는 ‘忠孝(충효)’라고 쓰인 거대한 액자가 걸려있습니다. 유사쿠와 달리 보편적인 정의보다는 국가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그의 가치관을 드러내주는 소품입니다.
타이지는 유사쿠를 압박할 때 “이런 (헌병)복장을 하고 있지만 체포는 제 취향이 아닙니다”라고 말합니다. 어쩔 수 없이 공무를 집행할 수 있으니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마치 일본이 저지른 악행이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의도치 않게 이뤄진 것이라고 항변하는 듯합니다. 여건상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의식 저변에 깔려 있는 사람들에게 과연 사과할 마음이 있을까요. 사토코가 유사쿠에게 던지는 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당신은 원래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잖아요. 그런 당신에게 대단한 권력이 주어졌죠. 시대가 당신을 바꾼 거라면 당신이 그 시대를 바꿀 수도 있었잖아요.“ 일본 지도자들이 어설프게 상황논리를 내세우기보다 능동적으로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을 왜 하지 않았냐는 통박입니다.
사토코는 처음엔 유사쿠를 말렸다가 생체실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본 후 마음이 바뀝니다. 남편의 뜻에 적극 동조하고 거사를 함께 꾸밉니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제대로 알면 일본인들도 생각이 바뀔 거라는 의미로 여겨집니다. 두 사람의 의도대로 세상은 움직이지 않지만, 미국은 진주만 공습을 계기로 일본과의 전쟁에 뛰어듭니다. 사토코는 공습으로 잿더미가 된 거리를 걷습니다. 여기저기서 들리는 비명과 울음소리 속에서 사토코는 홀로 말합니다. “이로써 일본은 패망하고, 전쟁은 끝나겠지. 매우 훌륭하다.” 불의를 바탕으로 한 국가 번영, 그런 번영 속 개인의 행복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외침이나 다름없습니다.
지난 14일 일본 산케이신문 보도에 따르면 일본 정부 고위 관료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해 “중국과 한국 따위에는 (비판을) 듣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지난 세기 주변국에 큰 피해를 주고도 진심 어린 사과에 인색했던 나라의 관료로서 저런 감정적인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스파이의 아내’에서 사토코는 정신병원에 감금되는데, 자신을 찾아온 지인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미치지 않았어요. 그 말인즉슨 제가 미쳤다는 것이지요. 필시 이 나라에서는요.”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우경화하는 일본사회에 보내는 경고장과도 같은 영화입니다. 일본인들이 “한국과 중국 따위” 운운하기 전에 이 영화를 보고 과거를 다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 지난 금요일 오전 한국일보 뉴스레터로 발송된 내용입니다. '라제기의 영화로운'을 좀 더 빨리 이메일로 받아보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를 눌러 구독 신청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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