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해군보다 정의로운 해적이 낫다

입력
2021.04.23 19:00
22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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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등장하는 해군 장교들의 옷에는 정의(正義)가 새겨져 있다. 세계정부의 영해를 관할하는 그들은 자신들이 절대적 정의를 추구하는 집단임을 자부한다. 실제로 많은 장병이 이 본분에 충실히 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군이 항상 정의롭기만 한 건 아니다. 알라바스타 왕국에서 내란을 사주하는가 하면, 역사적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고고학자들이 모여 사는 오하라섬을 섬멸하고 피난민들이 탄 배에 포격을 가해 침몰시킨다. 심지어는 '칠무해'라는 조직을 구성하고 해적 우두머리들에게 일부 바다의 치안을 일임하기도 한다. 차라리 정의로운 건 그런 악당들을 물리치고 조용히 제 갈 길을 떠나는 루피나 샹크스 같은 해적들이다.

정의로운 해적이라는 말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모순적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언어가 꼭 그 실체를 규정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에는 A라고 쓰더라도 B라고 읽히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어떤 말을 하는가보다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가가 더 중요하다.

20대 남자, 이른바 '이대남'들이 국민의힘 후보들에게 몰표를 준 걸 두고 일부 여당 지지층 사이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쏟아졌다. 핵심은 "아무리 여당이 못 했어도 어떻게 국민의힘을 뽑냐"는 것. 심지어는 "투기꾼 못 잡았다고 투기꾼을 뽑냐"는 주장도 나왔다. 그들로서는 민주화의 주역들로 가득한 더불어민주당이 친일정당, 투기를 조장하는 정당, 검찰과 재벌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당이라고 여겼던 국민의힘에 완패한 게 도무지 납득이 안 될 것이다. 분명 도덕적 우위를 점했다고 판단했는데 선택받지 못하니 그 책임을 20대 남자들에게 돌린다. 그들이 보수화되어서, 여성친화정책에 반발해서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다.

현 여권의 정치는 늘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인식에 기반했다. 적폐세력을 청산해야 한다느니, 총선은 한일전이라느니 하는 구호들은 그 배경에서 나왔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는 되짚어보지 못했다. 오늘날 보여주는 모습들은 양쪽 다 별반 다를 게 없는데 말이다.

듣기 좋은 말을 한다고 좋은 정치가 되지는 않는다. 국민이 체감할 수 있게 보여줘야 한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으면 '부모찬스'가 논란이 될 때 단호히 대처해야 하고, 투기세력을 잡겠다고 했으면 적어도 여권 정치인들의 다주택 보유에 엄격해야 한다. 이대남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을 나무라기에 앞서 소속 정치인의 성범죄 사건부터 제대로 처리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어땠나. 그들이 말의 성찬을 늘어놓고 시민 품에 안겨서 눈물을 흘리는 사이 집값은 두 배로 뛰었고 부모의 도움 없이 성공하는 길은 더욱 요원해졌다. 젠더 갈등도 봉합할 수 없을 만큼 격화되었다.

우리가 정치권에 바라는 건 '속이 뻥' 뚫리고 '뭉클'하게 하는 말들이 아니다. 단지 우리의 일상을 어제보다 나은 것으로 바꾸는 일이다. 일상을 외면한 고담준론으로는 삶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국민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불의한 해군보다 정의로운 해적이 낫다. 정부 여당은 지금이라도 과거에 가졌던 인식의 틀, 추상적 이념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민생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래는 없다.



이동수 청년정치크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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