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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입력
2021.04.22 18:0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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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보선 후 반성마저 문자폭탄에 후퇴
당심 뒤에 숨어 원칙 실종된 민주당
강성 당원 문제 회피해선 쇄신 불가능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들이 22일 국회 소통관에서 당 지도부에 요구하는 쇄신안을 발표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더불어민주당 초선의원들이 22일 국회 소통관에서 당 지도부에 요구하는 쇄신안을 발표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서울시장 보궐선거 중 “다 이겼다”거나 “박빙 승부”라던 더불어민주당의 예측은 블러핑 아닌 진심이었나 보다. 내년 대선도 어렵다는 당 밖 시선도 안 믿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렇게 위기의식 없이 태평할 수 있을까. 하기야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우상호 의원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을 칭송할 때 그들이 우물 속에 있음을 알아봤다. 발언의 부절적함은 말할 나위 없지만 그것이 표를 깎아먹을 줄 모른다는 게 충격이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똘똘 뭉친 탓에 여론을 제대로 읽지 못했을 것이다.

재·보선 참패 후 2030 초선 의원들이 조국 사태를 언급하며 반성의 뜻을 밝힌 것은 민주당이 반전의 출발로 삼을 기회였다. 그러나 강성 당원들의 문자폭탄에 또 굴복했다. 김해영 전 최고위원이 “선을 넘은 것”이라며 “당 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제대로 지적했지만 애석하게도 나서는 이가 없다. 당 대표에 출마한 홍영표 의원은 문자폭탄이 “민주당의 역동성”이라고 했고, 우원식 의원은 “강성 당원 쟁점화가 문제”라며 외면했다. 송영길 의원은 “입을 닫게 만드는 행위”라고 비판했지만 “조국 사태는 논쟁할 일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누가 당 대표가 된들 감흥도 기대도 없는 심정엔 이유가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경쟁의 양념 같은 것”이라고 했던 강력한 팬덤, 조직적 의견 표출은 이제 민주당을 고립시키는 저주가 되고 있다. 민주당이 집권 여당이 아니고 정권을 유지할 생각도 없다면 이를 민심으로 받들어도 상관없겠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를 탄생시킨 것은 3,000명 정도의 문자폭탄 투척자나, 공천에 동의한 적극 당원 18만 명이 전부가 아니다. 임기 초 문 대통령 지지층은 중도·보수를 아울렀으나 민주당이 강경파에 휘둘려 무리수를 둘 때마다 협소해졌다. 그러므로 무리수의 시작인 조국 사태는 반드시 짚어야 할 성찰의 지점이다.

민주당은 서울·부산시장 후보를 내지 않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정책 뒤집기도 실언도 막고, 차라리 내년 대선에 도움이 됐겠다. 총선 압승으로 거론조차 안 됐지만 위성정당도 세우지 말았어야 했다. 그랬어도 과반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결과를 알고서야 말이 쉽다. 미래가 불확실하고 패배가 두려울 때 이런 결단을 내리는 것을 우리는 원칙과 가치라 부른다. “원칙 있는 패배가 원칙 없는 승리보다 낫다”는 신념을 실천함으로써 당장 패배했으나 결국 승리한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러나 지금 민주당에는 원칙과 가치가 실종됐다.

당원의 뜻을 따랐다는 변명은 익명의 다수에게 책임을 떠넘긴 지도부의 비겁함일 뿐이다. 우승컵을 간절히 원하는 팬들에게 ‘반칙을 쓰면 이길지도 모르는데 해도 될까요’라고 물은 셈이다. 당원을 방패막이 삼아 원칙을 저버림으로써, 민주당은 더 큰 지지를 잃었다. 이낙연 전 대표가 당헌·당규 개정을 당원들에게 묻지 않고 원칙을 지켰다면 그는 지금과 다른 정치인이 돼 있을 것이다.

민주당은 우물 밖으로 나와야 한다. 22일 뒤늦게나마 성추행 피해자에게 사과하고, 초선의원들이 쇄신 요구안을 낸 것이 출발이 될 수 있겠으나 가장 어려운 일을 회피해선 소용이 없다. 문자폭탄으로 당내 토론을 막는 것은 양념이 아닌 테러임을 천명해야 한다. 전당대회 룰을 바꿔 강성 당원들에 휘둘리는 일을 제어해야 한다. 이는 당심과 민심을 저울질하는 문제가 아니다. 원칙을 바로세우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이다. 문 대통령이 진작 했어야 하는 일이다. 그토록 노무현 정신을 호명하는 당 대표 후보들이 책임져야 하는 일이다. 조국 사태를 금기시하고 문자폭탄을 얼버무리는 한, 민주당의 쇄신은 이미 실패다.

김희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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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원한국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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