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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무력감이 판타지 드라마를 찾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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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는 투명하리만치 현실을 반영하곤 해서 세상을 읽어볼 수 있는 색다른 렌즈가 되기도 한다. 메디컬 드라마는 병원 연애물, 법정 드라마는 법원 연애물이라는 농담이 있을 만큼 로맨스 위주였던 한국 드라마가 다양화되고 있다. 그중 스릴러 장르의 약진이 눈에 띄는데, 이 스릴러물들이 설정하는 범죄와 악의 뿌리, 그리고 그에 대한 법적 정의에 대한 인식은 마치 작가들이 모여 공동으로 아이템 회의를 함께한 것 아닌가 싶을 만큼 공통적인 상상력을 보여준다.
초능력자들이 부정의와 맞서 싸우는 '낮과 밤'과 '루카: 더 비기닝' '경이로운 소문'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경찰이었거나 현직 경찰이다. 하지만 이들은 법의 경계 바깥에서 정의를 실현한다. '빈센조'의 주요 인물들 역시 변호사들이지만, 악당이건 아니건 간에 양쪽 법조인들 모두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안다. 현실의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현실의 테두리 내에서 해결 방법은 없다. 마피아나 초능력자 정도는 되어줘야 사악한 권력에 맞설 꿈이라도 꾸어 보지 않겠냐는 것일까. 기묘한 장르적 융합이 이루어지는 '판타지 스릴러'라고 할 수 있겠다.
'빈센조'에서 인권변호사 홍유찬의 죽음이 빈센조라는 판타지적인 인물의 초법적인 활약의 시작점이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악당을 혼내주는 활약을 신나게 보면서도 동시에 사법 정의에 희망을 걸고 싸우는 보통의 사람들은 결국 악에 맞서 제대로 싸울 수조차 없다는 현실에 대한 패배감을 반복해서 확인하게 된다. 극 중 홍차영 변호사의 "법의 심판? 누구 좋으라고"라는 대사는 이런 현실 인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모범택시'에서 주인공들은 억울한 사람들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해결사들로 등장한다.
이러한 절망적 현실인식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괴물'이 보여준 현실에 대한 더 냉정한 집단적 상상력을 통해 과연 대중의 상상력 속 현실이 어떠한지 살펴보자. 가까이 지냈던 친구가 알고 보니 연쇄살인범이고, 친구의 전남편은 여러 건의 살인자이고, 친구의 어머니는 살인의 흔적을 지우고 수사를 방해하는 등 이 마을에서는 범죄자와 이웃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다. 경찰이고 주민들이고 모두 아는 사이인 작은 시골 마을에서, 주요 인물인 경찰들은 결국 법의 경계 안에만 머무를 수가 없다. 범죄자와 이웃의 경계, 그리고 적과 가족의 경계마저 무너진 혼돈 속에서 모든 범죄의 마지막 퍼즐이 아버지라는 것은 누구도 신뢰할 수 없고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암담함을 전달한다.
2017년 여름 '비밀의 숲'이 전달했던 사법적 정의에 대한 희망은 사라지고, 이제 정의 구현은 슈퍼 히어로 아니면 최소한 마피아는 등장해야 개연성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되어 버렸으며, 범죄자와 이웃의 경계마저 사라져 모두를 의심할 수밖에 없어진 것이 2021년 사람들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감정이다. 슈퍼 히어로 같은 등장인물들이 비현실적인 활극을 펼치지만, 공권력과 정치인, 기업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마음껏 공모하고 법 따위는 다 무시하는 설정들을 시청자들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집단적 상상력은 어떤 물음을 던지고 있는가? 이 물음을 단지 드라마의 허구적 상상력일 뿐이라 치부하는 우를 책임 있는 사람들은 범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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