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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가 시샘한 원조 가스코뉴 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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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격주 토요일 <한국일보> 에 찾아옵니다. 2018년 소펙사(Sopexaㆍ프랑스 농수산공사) 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출판사 시대의창 김성실 대표가 씁니다. 한국일보>
얼마 전 두 지인이 와인 사진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연달아 올렸다. 그들은 처음 보는 와인이라면서 맛이 궁금하다고 했다. ‘가이약’과 ‘카오르’, ‘마디랑’과 ‘이룰레기’라는 산지(AOC)에서 만든 와인이었다. 모두 프랑스 남서부(Sud-Ouest) 지역 와인이다.
프랑스 남서부 와인을 예로부터 ‘가스코뉴’ 와인이라고 불렀다. 7세기 에스파냐의 바스콘(바스크) 부족이 이곳으로 건너오면서부터 바스코니아 또는 가스코뉴라고 칭했다. 남서부 지역은 피레네 산맥에서 지롱드강 입구까지를 포함한다.
가장 부유했던 땅, 아키텐 공국 영주와 딸
가스코뉴는 중세 아키텐 공국에 속했다. 당시 아키텐 공국은 기욤10세의 영지였다. 기욤은 아키텐 공작이면서 가스코뉴 공작령과 푸아투 백작령을 모두 가졌기에 프랑스에서 가장 힘있는 영주였다. 그의 영토는 오늘날 브랜디로 유명한 코냑과 보르도 지방 전역, 남서부 땅을 포함했다. 프랑스 영토의 4분의 1에 달해 국왕령보다도 넓었다. 말하자면, 국왕령이 수도권이라면 아키텐 공국은 충청남북도와 전라남북도를 합친 것보다 넓었다.
아키텐 공국은 물산이 풍부했다. 특히 포도 농사가 잘됐다. 서쪽으로는 대서양과 면해 있고, 내륙 곳곳은 강줄기가 사방으로 뻗어 있어 수로 교역이 활발했다. 그야말로 천혜의 환경에 자리한 아키텐 공국은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었다.
기욤 10세에게는 알리에노르라는 딸이 있었다. 딸이 여덟 살 때 아내와 아들을 잃은 기욤은 딸을 애지중지 키웠다. 알리에노르 또한 영특해 기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녀는 모국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알았고, 시와 음악을 즐겼으며, 승마와 사냥 실력도 수준급이었다. 게다가 출중한 외모에 패션 감각마저 좋았다고 한다. 금수저에 능력까지 겸비한 셈이다.
알리에노르가 열네 살이 되자 기욤은 본격적으로 상속을 준비했다. 봉신들을 소집해 딸에게 충성 서약을 하게 했다. 왕세자를 사윗감으로 점찍고는 자신의 상위 주군인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에게 딸의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기욤은 죽음을 예견했던 걸까. 얼마 후 성지순례를 떠난 기욤이 죽고 만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순례길에서 오염된 물을 마신 탓이었다. 딸이 눈에 밟혔는지 생의 마지막 순간에 기욤은 이런 유언장을 남겼다.
“모든 영지를 알리에노르에게 상속한다. 프랑스 국왕 루이 6세가 딸의 후견인이 된다. 단, 상속된 영지는 알리에노르의 상속자만이 상속받을 수 있다.”
알리에노르 두 번의 불행한 결혼
이 소식을 들은 루이 6세는 유언장 단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알리에노르가 왕자를 낳으면 어차피 그 땅은 프랑스 왕실의 소유가 될 것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루이 6세는 왕세자와 알리에노르를 서둘러 혼인시켰다. 아키텐 공작이자 가스코뉴 공작이며 푸아투 백작인 열다섯 살 알리에노르는 프랑스 왕세자비가 되었다. 얼마 안 되어 루이 6세도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떴다. 왕세자가 뒤를 이어 루이 7세로 프랑스 국왕 자리에 오르자, 마침내 알리에노르는 프랑스 왕비가 됐다.
동화는 여기서 끝나겠지만, 현실은 달랐다. 루이 7세와 알리에노르는 여러 면에서 맞지 않았다. 왕은 고지식하고 신앙심이 깊은 반면 왕비는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했다. 루이 7세는 이런 알리에노르를 사랑하면서도 끝내 이해하지는 못했다. 왕실 가족과 성직자들도 왕비를 탐탁지 않아 했다. 왕비가 문란하다며 입방아를 찧더니 말을 부풀려 스캔들을 만들기도 했다.
왕과 왕비는 제2차 십자군 원정에도 동행했지만 외려 사이가 더 벌어졌다. 의견 대립도 빈번한 데다가 안티오키아의 통치자 레몽과 왕비가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레몽은 왕비의 숙부였기에 추문은 극에 달했다. 알리에노르는 루이 7세와 교황에게 ‘우리는 애초 혼인이 성립할 수 없는 근친(둘은 10촌이라 혼인에 문제는 없다)이니 이 혼인은 무효’라며 이를 인정해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루이 7세와 교황은 아키텐 영토를 잃는 게 꺼림칙했지만, 결국 혼인 무효에 동의했다.
8주가 지난 어느 날, 알리에노르의 재혼 소식이 들려왔다. 그녀가 서둘러 결혼한 데에는 광활한 영지를 소유한 그녀를 납치라도 해서 결혼하려던 흑심 많은 영주들 탓도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루이 7세와 결별한 뒤 자신의 영지로 돌아가는 길에 두 번이나 납치당할 뻔했다.
알리에노르의 결혼 상대는 노르망디 공작이자 앙주 백작이며 잉글랜드 왕위 계승 후보자인 헨리 플렌태저넷이었다. 헨리는 당시 서른 살인 알리에노르보다 열한 살 어린, 젊은 귀족이었다. 알리에노르는 오래전부터 헨리를 재혼 상대로 점찍어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은 이성적으로 호감도 있었던 데다 서로가 원하는 야심을 현실화하기에도 조건이 딱 들어맞았다.
결혼하고 2년 뒤 헨리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가 된다. 알리에노르는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고, 헨리 2세는 잉글랜드뿐만 아니라 프랑스 서부 전체(아키텐, 가스코뉴, 푸아투, 앙주, 노르망디)를 손안에 넣었다.
과연 루이 7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프랑스 국왕의 봉신인 노르망디 공작 따위가 자신보다 10배나 많은 땅을 차지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 땅의 일부는 알리에노르가 자신과 결별하면서 되찾아간 땅 아닌가.
그런데 알콩달콩 잘 사나 했더니 알리에노르와 헨리 2세의 사이에도 균열이 생겼다. 여덟 명의 자녀를 둔 것을 보면 언뜻 금슬이 좋아 보였지만, 헨리 2세는 일삼아 외도했다. 부부 사이는 갈수록 더 벌어졌다. 그러다 알리에노르는 헨리 2세에게 반란을 일으킨 아들들을 도왔다가 발각되어 15년 동안 유폐됐다.
그녀는 헨리 2세가 죽은 뒤 왕위에 오른 아들 리처드 1세에 의해 구금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사랑한 아들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해 장렬하게 싸워 '사자왕'으로 불렸다. 하지만 리처드 1세 역시 일찍 생을 마감해, 막내아들 존이 왕위에 올랐다. 알리에노르는 존 왕의 섭정을 하다 여든두 살에 눈을 감았다.
전화위복, 프랑스 와인 생산 호황
다시, 아키텐으로 돌아가 보자.
프랑스는 아키텐을 잃어 속이 쓰렸지만 아키텐 공국의 백성들은 입장이 달랐다. 알리에노르의 남편과 아들 두 명이 잉글랜드 왕이 되면서 아키텐 공국의 와인 생산자들이 호황을 맞았기 때문이다. 잉글랜드는 가스코뉴 와인을 본격적으로 수입했다. 앞서 언급한 가이약, 카오르, 마디랑, 이룰레기와 같은 남서부 와인들 말이다.
참고로 가이약은 프랑스 최초의 포도밭 가운데 한 곳으로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로마를 통해 익힌 포도 재배법으로 와인을 양조했다. 가이약에서 가까운 ‘몽탕(Montans)’에서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암포라(항아리)를 만든 터와 와인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당시 가이약 와인은 강을 따라 ‘부르디갈라’(보르도)까지 운반되었다고 한다.
시대 분위기도 아키텐 공국의 와인 생산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았다. 당시 유럽은 인구가 급격히 늘었다. 도시가 성장하고 교역이 활발해지면서 부유한 상인 계층이 생겨났다. 이들은 봉건 귀족, 교회 고위층과 더불어 주요 와인 고객이 되어 수많은 고급 와인을 소비했다.
대서양에 접한 항구들에선 와인 무역선이 매일 출항했다. 특히 라로셀항과 보르도항이 와인 무역의 중요 항구였다.
라로셀항은 12세기에 알리에노르의 아버지 기욤 10세가 건설했다. 초기에는 인근에서 생산한 소금을 수출하던 항구였다. 소금 수요가 많아지자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곧 와인이 돈이 된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은 항구 내륙에 포도밭을 조성해 와인을 생산했다. 이곳이 오늘날 유명 브랜디 코냑을 만드는 곳이다.
13세기에 이르자 보르도항이 부상한다. 리처드 1세 때까지만 하더라도 보르도는 라로셀에 비해 세금에서 차별을 당했는데, 존 왕이 보르도에도 세금 혜택을 줬기 때문이다. 사실 프랑스 땅의 2분에 1에 달하던 영지를 대부분 빼앗겨 ‘실지왕’이라는 별칭이 붙은 존 왕은 잉글랜드 역사에서는 가장 무능한 왕으로 기록되었지만, 보르도 입장에서는 은인이었다.
영국까지 점령한 가스코뉴 와인
1224년에는 라로셀마저 프랑스령에 귀속되자 아직 잉글랜드령이었던 보르도항은 독보적인 와인 무역항으로 성장했다. 이때부터 가스코뉴 와인이 잉글랜드 와인 시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돈이 몰리면 그 ‘값’을 치러야 하는 법. 보르도에서도 라로셀과 유사한 일이 발생했다.
가스코뉴 와인을 수출하던 상인들은 이즈음부터 보르도를 중심으로 곳곳에 포도밭을 조성했다. 보르도 우안, 그라브, 앙트르 두 메르 지역에 포도밭이 속속 들어선 것이다. (참고로 오늘날 보르도에서 가장 유명한 메독 지구는 당시엔 목초지였다. 이곳에는 17세기에 와서야 포도밭이 조성된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서부 지역에서 생산된 와인만을 가스코뉴 와인이라 칭했다. 와인 상인들은 ‘한낱’ 보르도 와인을 ‘인기’ 가스코뉴 와인으로 둔갑시켜 잉글랜드로 수출하곤 했다. 그러다 언제부턴가 보르도 와인과 기존 가스코뉴 와인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에서는 보르도 와인을 ‘클라레’라 칭했다. 클라레가 잉글랜드 시장에서 먹히더니 곧 보르도 상인들은 클라레를 더 팔기 위해 남서부에서 생산된 가스코뉴 와인을 경계하기에 이른다.
가스코뉴 와인이 잊힌 이유
남서부 와인은 강 수로를 따라 보르도까지 운반해야 했다. 이러한 약점을 노린 보르도 상인들이 ‘특별한’ 규정을 만들었다. “남서부 와인은 먼저 보르도 와인을 수출한 뒤에야 보르도항에 반입할 수 있다.” 12~13세기 잉글랜드 시장을 사로잡은 가스코뉴 와인은 유통망을 잃고는 점점 소비자들에게 잊혔다.
보르도보다 양조 역사가 오래되었을뿐더러 한때 보르도 와인이 가스코뉴 와인 행세를 한 걸 생각하면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지만, 남서부 가스코뉴 와인 생산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지역에서만 팔거나 보르도 와인에 섞어 ‘유령 와인’으로 팔아야 했다.
보르도 와인의 그늘에 가려진 가스코뉴 와인은 17세기에 잠깐 부활하는가 싶더니 최근까지 빛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역 와인으로 명맥을 이어온 남서부 가스코뉴 와인이 최근 다시 떠오르고 있다. 눈 밝은 애호가들이 이를 모를 리 없다. 글머리에 언급한 필자의 두 지인처럼. 역시 원조 맛집은 찾아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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