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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꾸러기 발명왕, 미라는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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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책은 결코 유치하지 않습니다. ‘꿈꿔본다, 어린이’는 아이만큼이나 어른도 함께 읽으면 더 좋을 어린이 책을 소개합니다. 미디어리터러시 운동을 펼치고 있는 박유신 서울 석관초등학교 교사가 '한국일보'에 4주마다 금요일에 글을 씁니다.
우리에게 '로보트 태권V'로 잘 알려진 김청기 감독은 로봇 애니메이션 외에도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는데, '꾸러기 발명왕'(1984)도 그중 하나다. 당시엔 과학 학습 만화영화로 방영되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성실하게 연구하는 어린이들이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프로파간다 영화에 가깝다. 로봇 발명에 관심을 가진 강민은 미라, 우람, 홍만과 함께 연구에 매진한다. 강민의 로봇 연구는 우주에서 인민군 복장을 한 로봇을 무찌르는 애국 판타지로 연결되며, 또 다른 남자주인공 홍만의 생명공학 연구는 슈퍼토끼를 길러 조국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 나라의 꿈나무들이야. 여러 우수한 어린이들이 과학자가 되어서 장차 이 나라를 이끌어 가야 해. 그러기 위해선 항상 연구하는 자세가 필요해.”
지금 보면 너무 노골적이라서 부끄럽고 웃긴 ‘만화영화’이지만, 꾸러기 발명왕에 담긴 과학교육관은 1980년대 이후의 과학교육 기조 및 담론의 중심이었다. 4월 '과학의 달'을 맞아 열리는 과학경진대회, 과학고 등 과학영재교육은 모두 이 시대에 시작됐다.
문제는 그때도, 4차 산업혁명으로 과학 붐이 다시 일어난 지금도 여성 과학자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듣기가 어렵다는 거다. 꾸러기 발명왕들은 삼촌, 아버지, 이웃집 남자, 과학교사 등 다양한 남성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아 연구에 성공하고 마침내 태극기가 걸린 강당에서 둥글게 탈모가 된, 사각테의 안경을 쓴 권위자에게 상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가부장 승계-과학꿈나무 서사에서, 서사가 주어지지 않은 유일한 여자 꾸러기 발명왕, 미라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과학저술가 이지유의 '나의 과학자들'은 그런 의미에서 소중하고 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책은 꿈이 많았고 특히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여자 어린이 지유가 어떻게 과학을 알아가고 성장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과학을 전공하고, 과학저술가 이지유로서 과학책을 쓰게 되었는지를 풀어낸다.
책은 단순한 자전적 이야기를 넘어 삶의 매 단계, 과학적 관심 속에서 관계를 맺어온 여성 과학자와 그들의 연구에 대한 과학적 지식으로 확장된다. 우리는 책장을 넘길 때마다 '이렇게 많은 여성 과학자들이, 이렇게 중요한 연구를 했단 말인가!' 하고 새삼 놀라게 된다. 태양이 수소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발견한 세실리아 페인가포슈킨부터 하늘에 있는 모든 별의 분류 체계를 만든 애니 점프 캐넌, 말라리아 치료제를 개발한 투유유까지.
작가가 직접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여성 과학자들의 초상은 이 책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이다. 이미지만으로 충분하지만, 작가는 책 중간중간 실크스크린 작업과 관련한 단상들을 ‘JIYOU’S TALK‘에 담아내었고, 이 글에는 여성 이공계 전공자로서 살아온 경험과 더불어 여성 과학자의 초상을 작가가 직접 선택하고, 해석한 관점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마리 퀴리의 초상에 있어 강인한 인상 대신 편안한 이미지를 선택한 것과 관련하여 작가는 질문한다. “하지만 내 것을 지켜 내려고 남보다 백 배나 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은 공정한 사회일까? 내 것은 그냥 내 것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여성 과학인의 삶에서 우러나온 공정함에 대한 질문이 마음을 두드린다.
이 책의 마지막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작가의 이름과 같은 ‘지유’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 어린이들의 초상을, 그리고 튤립의 이미지를 넣었다. 여성 과학자들의 탐구와 발견의 삶은 튤립 구근처럼 과학저술가 이지유 작가를 통해 다시 어린 지유들에게로 계승된다.'
“나는 내년 봄을 기다리며 튤립 구근을 심고 있다. (중략) 나는 이 꽃을 못 보지만, 두 달 전에 태어난 새끼 고양이들과 이웃 아이들은 이 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더 잘 심어두자.”
미래를 살아갈 어린 이웃들이 보게 될 꽃을 위해 구근을 심는 마음, 책을 왜 쓰는가에 대한 작가의 말이 이보다 더 감동적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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