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보호단체 비글구조네트워크(비구협) 김세현 이사는 지난 3일 경기 이천시 유기동물보호소가 농림축산검역본부동물보호관리시스템(APMS)에 올린 유기견 공고를 보고 깜짝 놀랐다. 사진 속 개는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있었다. 김 이사는 5일 새벽 보호소와 연락이 닿자마자 달려가 개를 구조했다.
화재로 보호자 사망… 혼자 남겨진 개
지난달 19일 밤 10시 11분. 경기 이천시 율면 신추리 한 컨테이너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경기도 소방재난본부에 따르면 불길은 32분 만에 잡혔지만 컨테이너에 살던 남성은 화재로 사망했고, 밖에서 기르던 개 두 마리 중 한 마리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화재 진압팀이 몸에 불이 붙은 개를 발견하고 불을 꺼주면서 남은 한 마리는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온 몸에 화상을 입은 채였다. 조사팀이 남아 사망자 가족과 면담하고 화재원인 등을 조사한 뒤 귀소했다. 그러는 동안 목줄에 묶인 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개는 현장에 남겨졌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개는 참혹한 화재 현장에 무려 11일이나 방치됐다.
화재 후 11일 만 시민이 시청에 신고
이천시청에 유기견 구조 요청이 들어온 건 화재 발생 이후 11일이 지난 3월 30일. 화재가 난 지역 주민이 미동조차 없는 개를 발견하고 시청에 신고를 했다. 구조 요청을 받은 위탁 보호소 직원은 당일 오후 6시 30분쯤 현장에 도착했다. 그는 "만지기 힘들 정도로 화상을 입은 개가 웅크리고 있었다"며 "구조하기 위해 목을 잡았는데 많이 아파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이천시 보호소로 들어온 이후에도 개는 소독 이외에는 제대로 된 처치를 받지 못했다. 밥을 넘기고 물도 조금 마실 수 있는 상태였지만 눈을 뜨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워했다. 개에게 진통제나 항생제 등 처방은 내려지지 않았다. 보호소 관계자는 "절대 방치한 것은 아니다"며 "다만 약을 발라주고 항생제를 먹이는 등 조치를 하지 못한 점은 인정한다"고 했다.
보호소에 들어온 뒤 3일 후 올라온 공고
개가 보호소에 들어온 건 지난달 30일이지만 실제 APMS에 공고가 올라온 건 사흘이 지난 이달 3일이었다. 보호소 측은 공고가 지연된 이유에 대해 "일하던 직원이 그만두고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인수인계하는 과정에서 공고 작업이 늦어졌다"고 설명했다. 결국 김세현 이사가 5일 새벽 구조해 병원으로 보내기까지 17일간 개는 화상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셈이다. 구조된 개의 새 이름은 '아톰'. 김세현 이사가 구조 후 역추적해본 결과 자세한 구조 경위와 화상을 입은 과정 등이 확인됐다. 아톰은 지금도 동물병원에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다.
화상 입은 개가 17일이나 치료받지 못한 이유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사연이 알려지자 경기도 소방재난본부 측은 "조사팀에 확인해보니 당시 현장에 남은 가족이 있었기 때문에 개를 두고 온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어 "화재 발생 시 동물 구조에 대한 매뉴얼이나 지침은 없지만 도의적 조치는 하고 있다"며 "무연고 동물의 경우 보호소에 인계를 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김세현 이사는 "인명사고가 발생한 데다 화재진압이 우선이라는 점은 이해가 간다"면서도 "하지만 동물이라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리면서 결국 화상을 입은 개가 17일이나 치료받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그는 "재난 발생 시 동물 구조는 소방관들의 도의적 책임에 맡길 게 아니다"며 "이에 대한 지침이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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