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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산, 아버지 산 품속... 그림 같은 봄날을 거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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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소도시를 다녀 보면 ‘지방소멸’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사람은 늙고 마을은 낡아간다. 옛 건물을 현대적으로 개조해 복고 감성을 입힌 카페나 숙소가 더러 있지만, 마을 분위기를 바꿀 정도는 못 된다. 식당이나 카페가 밀집된 관광지를 빼면 한 번 가보라고 권하기가 민망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완주 구이면은 여느 시골과 좀 다르다. 속절없이 낡아가는 골목 대신 시골답지 않은 세련됨이 눈길을 잡는다. 옛 마을 아래에 깔끔한 전원주택 단지가 들어서 있다. 무분별하게 산을 깎아내고 나 보란 듯 지은 서울 근교의 전원주택에 비하면 소담하고 푸근하다. 바로 앞에는 아담한 저수지가 있어서 눈이 맑고 기분이 상쾌해진다. 자극적인 요소라곤 계절마다 눈부신 자연뿐이다. 일상의 평화가 그림 같은 마을이다.
전주를 감싸고 있는 완주군은 전형적인 농촌이면서도 아주 시골은 아니다. 군 단위지만 인구는 김제나 남원시보다 많다. 전주의 남쪽에 위치한 구이면은 한옥마을에서 불과 12㎞ 떨어져 있다. 한적한 시골이면서 사실상 도시의 편리함을 두루 누릴 수 있는 거리다.
경각산에 오르면 모악산과 구이저수지 사이에 자리 잡은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파란 호수는 눈이 시리게 푸르고, 주변 산자락으로 번지는 봄 빛깔이 찬란하다. 오른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드넓은 평야 뒤로 멀리 전주 시내의 아파트 단지가 아련하게 보인다. 경각산은 높이(659m)에 비해 거저 오를 수 있는 산이다. 힘들게 정상까지 갈 필요가 없다. 임실로 넘어가는 749번 지방도로 불재 고갯마루에서 약 10분 만 걸으면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능선을 깎고 인조잔디로 덮어 놓은 모양이 다소 거슬리지만, 발아래 펼쳐지는 전망은 넓고 시원하다.
구이(九耳)라는 지명은 경각산 바로 아래 구암마을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마을에 거북 형상의 커다란 바위가 있어 조선 중기 이래로 귀동, 귀암마을로도 불려왔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거북 귀(龜)’ 자가 획수가 복잡하고 쓰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홉 구’로 고쳤다고 한다. 본뜻을 잃어버렸으니 구운 음식이라는 뜻으로 오해할 만도 하다. 인근 태실마을은 조선 8대 임금인 예종의 태실이 있었던 곳으로 예전부터 명당으로 소문나 있었다.
지역에서는 경각산을 아버지 산, 모악산을 어머니 산으로 부른다. 경각(鯨角)은 고래등에 뿔이 툭 튀어나온 것 같다는 의미다. 모나고 가파른 경각산보다 치마폭처럼 산세가 부드럽게 흘러내린 모악산이 아무래도 어머니 품처럼 푸근하다. 정상 아래 '쉰길바위'의 형상이 아기를 안고 있는 어머니 같다고도 하고, 사방팔방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호남평야의 젖줄인 동진강과 만경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덧붙인다. 구이면은 모악산 치맛자락이 바닥에 끌리는 곳에 자리 잡았다. 마을 끝자락은 잔잔한 구이저수지와 닿아 있어 산마을이면서 호수마을이다.
구이저수지는 둘레가 약 8km로 아담한 수준이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끝난 직후 건설할 당시에는 큰 공사였던 듯하다. 제방 끝에 설치된 준공 기념비에는 1953년 공사를 시작해 9년 뒤인 1962년 완공하기까지의 과정이 구구절절하게 적혀 있다. 비문은 “무릇 치수지도는 요순과 우성(禹聖)의 가르침이요, 농은 천하지대본이라”로 시작한다. ‘미곡생산’뿐만 아니라 ‘산업진흥과 국가경제안정’까지 언급하며 이 저수지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전주토지개량조합장 명의의 글은 토씨를 빼면 거의 한자로 쓰여져 있다. 한자를 섞어야 권위가 살던 시절의 분위기가 읽힌다. 취수탑으로 연결되는 문에 쓴 ‘용지불갈(用之不渴)’이라는 표현도 눈길을 끈다. 아무리 사용해도 마르지 않는다는 뜻으로, 구이저수지의 넉넉함과 식량 증산의 기대를 한꺼번에 담은 듯하다.
요즘 구이저수지는 농업용수 공급이라는 본래의 기능보다 여가시설로 더 주목받고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오는 둘레길이 조성돼 있다. 구이농협 뒤편으로 나가면 제방으로 연결된다. 일직선으로 시원하게 뻗은 길을 벗어나면 맞은편 산자락으로 목재 덱 길이 이어지고, 다시 산자락을 따라 돌면 전원주택 단지인 호수마을 앞 새누공원(새로운 터라는 의미다)으로 돌아온다. 산등성이를 거슬러 오르는 봄빛과 잔잔한 호수의 운치를 한꺼번에 누리는 길이다. 오르막이 거의 없어 평온하게 느리게 걷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보통은 면소재지 맞은편에 있는 ‘대한민국 술테마박물관’까지 왕복한다.
이곳에 술테마박물관이 들어선 이유는 뭘까. 술의 원료인 쌀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호남평야가 가깝고 물이 좋다는 이유를 든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박물관을 지을 적당한 구실을 끌어다 붙인 것으로 보인다. 박물관은 중세 이전부터 일제강점기 전통술을 말살하기까지의 역사적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관혼상제 등 일상에 깊숙이 뿌리 내린 술의 역할과 의미를 짚는다. 지역의 문화가 깃든 전국의 전통술과 세계 각국을 대표하는 술도 한곳에서 볼 수 있다. 시대상이 반영된 당대의 술 광고 포스터를 모아 놓은 전시실도 눈길을 끈다. 애주가에게는 특히 흥미로운 박물관이다. 계단마다 붙여놓은 술 권하는 문구는 조금 거슬린다.
경각산을 사이에 두고 구이저수지 반대편 산자락에는 공기마을 편백나무숲이 있다. 자연스럽게 공기가 좋은 마을을 떠올리게 되는데, 실제는 마을 주변 산세가 밥공기처럼 오목하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공기마을 편백나무숲은 1976년 산림녹화 사업으로 주민들이 조성했다. 힘들게 산을 오르내리며 심은 10만 그루의 편백나무, 삼나무, 잣나무가 40년을 넘기면서 아름드리 숲으로 성장했다. 면적은 넓지 않은데 나무의 밀도는 국내 어느 숲에도 뒤지지 않는다. 촘촘하게 심은 편백나무가 매끈하게 뻗은 숲으로 들어서면 한낮에도 그늘이 들지 않을 정도로 어둑어둑하다. 바닥에는 볕이 적고 습한 땅에 잘 자라는 양치식물이 움트고 있다.
산책로는 그리 길지 않은데 경사가 다소 가파르다. 하지만 계단이 아니라 갈지자를 반복하는 산길이어서 힘들지 않다. 곳곳에 놓인 평상이나 벤치에 잠시 쉬어 가면 숲이 내뿜는 신선한 기운과 평온함이 느껴진다. 편백숲 입구에는 분위기 좋은 카페도 몇몇 있어서 한나절 숲 나들이 장소로 추천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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