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집은 ‘사고파는 것’이기 전에 ‘삶을 사는 곳’입니다. 집에 맞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요? 삶에, 또한 사람에 맞춰 지은 전국의 집을 찾아 소개하는 기획을 수요일 격주로 <한국일보> 에 연재합니다. 한국일보>
서울 명륜동 언덕배기의 오래된 붉은 벽돌집 사이를 비집고 회색 집 하나가 비죽 올라왔다. 거미줄처럼 얽히고 설킨 골목에 흩어져 있는 철제 대문 사이로 목재 대문이 보석처럼 콕 박혀 있다. 이 집은 명륜동 토박이 김수연(43)·오민영(41) 부부가 1년여 전에 새로 지은 ‘호와원’(집 이름은 두 아이의 이름 한 자씩을 따 지었다)이다. 인근의 10평 남짓한 작은 주택에 살았던 부부는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자 각자의 방을 만들어주려고 집을 알아봤다. 부부는 “아이들이 크면서 활동량도 늘어나면서 좀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며 “하지만 저희 예산으로 대출을 받아서 아파트를 사는 것보다 작더라도 단독주택을 지어 일부는 임대를 주고 월세를 받는 게 나았다”고 말했다. 부부는 다락이 있는 3층집(연면적 147㎡ㆍ45평)을 지어 1층은 임대를 줬다.
비스듬한 육각형 집
예산에 맞춰 구입한 땅(대지면적 112.4㎡ㆍ34평)은 비정형이었다. 가파른 경사지에 오밀조밀한 집들 사이에 있는 오래된 집을 철거하자 비뚤비뚤한 땅이 드러났다. “감자처럼 울퉁불퉁해서 처음엔 ‘감자집’이라고 불렀어요. 작고 경사진 땅을 많이 봤지만 가장 난해한 땅이었죠.” 설계를 맡은 이재혁 건축사(에이디모베건축사사무소 소장)의 얘기다. 이 건축가는 명륜동에 본인 집을 비롯해 여러 채를 설계했다.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집도 불규칙한 대지의 형태를 따르다 보니 비스듬한 육각형에 가까워졌다. 집은 콘크리트로 기반을 닦았고, 목구조로 지었다. 1층부터 옥상까지 네모 반듯한 공간은 없다. 현관이 있는 2층은 네 식구의 방이 배치돼 있다. 투명한 창이 있는 목재 현관은 구조를 살짝 꺾어 내부가 훤히 드러나지 않게 배려했다. 내부에서는 투명한 창 너머까지 시선이 확장돼 더 넓어 보이는 효과가 있다. 현관 앞에는 들어올 때 손을 씻거나, 반려동물 발을 씻기기 위한 작은 세면대를 뒀다.
현관을 지나면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과 일렬로 배치된 방을 이어주는 복도가 나온다. ‘아이들에게 작더라도 각자의 방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부부의 요구대로 두 아이의 방이 나란히 붙어 있다. 이어 화장실과 부부의 방 순이다. 각 방의 맞은편 벽은 수납공간으로 만들었다.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쓰기 위해서다.
아이들 방문은 막힌 여닫이문이 아니라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다. 데칼코마니처럼 벽을 중심으로 두 아이의 방이 나뉜다. 공간을 나눈 벽에는 책상과 책장이 달려 있다. 두 아이의 방 앞으로는 폭이 좁은 베란다가 나 있다. 벽을 중심으로 앞뒤로 순환 동선이 자연스레 형성됐다. 베란다 좌우로 작은 창을 내어 현관과 화장실을 연결하고, 위로는 천장 없이 3층으로 연결된다. 3층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아래까지 쏟아진다. 이 건축사는 “아파트의 각 방들처럼 문을 닫고 들어가면 막힌 공간이 되는 게 아니라 투명한 방문과 발코니, 창 등을 통해 각 공간들이 서로 연결되면서 확장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3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한쪽 면은 밋밋한 벽 대신 다락까지 높은 책꽂이가 이어진다. 책뿐 아니라 화분, 액자, 그림, 기념품 등 가족들의 추억이 묻어나는 소품으로 채워졌다. 이 건축가는 “면적을 차지하는 계단은 낭비되는 공간으로 여겨지기 쉽다”라며 “하지만 벽면 책꽂이를 두거나 폭을 넓히는 등 기능을 부여해주면 공간 활용도가 높아진다”고 말했다. 벽에 작은 창을 내어 답답함도 덜어냈다.
거실과 주방이 있는 3층은 가족들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다. 3층은 공간을 구획하지 않고 확 트여 있다. 정면의 높고 긴 창에서 들어온 빛은 가족들이 모이는 원형 식탁으로 흘러 내려온다. 동쪽으로는 주방과 홈카페가 있다. 이곳도 별도의 문이나 벽으로 공간을 구획하지 않고 수납공간과 조리대를 활용해 살짝 분리했다. 각 공간은 열려 있지만 아늑하다.
3층에서 시선은 끊임없이 외부로 향한다. 홈카페의 기울어진 벽을 따라 설치된 나무선반 위로 삼각형 천창과 모서리 창이 시선을 끌어당긴다. 하늘부터 아이들이 뛰노는 골목길 풍경까지 시원하게 보인다. 반대편엔 거실 너머 베란다에 설치된 목재 루버(여러 개의 얇은 판을 수직으로 배열하는 방식)가 시선을 바깥으로 끌고 간다. 부부는 “소파에 앉으니 루버가 외부 시선은 막아주면서 내부에서는 바깥이 잘 보였다”라며 “집이 비뚤비뚤 지어진 것 같아도 창의 위치, 동선, 구조 등이 현명하게 배치돼 어지럽거나 복잡하지 않다”고 말했다.
“우리가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됐죠”
2, 3층이 생활 공간이라면 다락과 옥상은 놀이 공간이다. 다락과 옥상으로 가는 계단도 따로 만들어 온전한 공간으로 누린다. 박공 지붕 아래 놓인 다락은 일찌감치 남편이 점찍어 두었던 공간이지만, 집이 지어지자마자 아이들이 가장 먼저 차지했다. 아이들은 숨바꼭질도 하고, 보드게임도 하고, 책도 읽고, 그냥 뒹굴며 천창으로 하늘도 감상한다.
사계절을 만끽할 수 있는 옥상은 가족 전용 놀이터다. 지난해 코로나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옥상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했다. 남쪽으로는 서울의 남산타워가, 북쪽으로는 성곽길이 보인다. 옥상은 시시때때로 바비큐 파티장으로, 여름이면 수영장으로, 겨울엔 눈밭으로 변한다. 요즘은 텃밭도 가꾸고 텐트도 친다. “이 집으로 와서 가장 만족스러운 공간은 바로 이 옥상이에요. 마치 한 층만 올라가면 여행 가는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해주거든요.”
가족들의 삶은 집의 형태만큼이나 다채로워졌다.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집에서 즐길거리는 많아졌고, 이야깃거리는 풍성해졌다. “사실 저희도 처음 집을 지어봤잖아요. 방은 몇 개가 있으면 좋겠고, 채광이나 통풍이 잘돼야 하고 이런 것만 말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건축사가 집을 지으면서 집에서 제일 많이 머무는 공간은 어딘지, 쉴 때는 뭘 하고, 평소에 좋아하는 카페나 공간은 어디인지, 가족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묻더군요. 답을 하다 보니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게 뭔지 명확해졌어요. 수영장을 설치할 옥상이 꼭 있어야 하고, 방은 작아도 홈카페는 있어야 하고요. 이 집은 우리가 좋아하는 걸 할 수 있는 집이에요. 이제 같은 값이라도 평평한 아파트에서는 살기 힘들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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